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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yu May 20. 2022

맥락 없는 행복의 조건

 오늘도 남학생 네 명이서 아옹다옹 작은 다툼이 있었다. 별일 아닌 거 같아 보였으나 당사자는 서럽다. '무슨 일인데' 한 마디에 눈물샘이 폭발했다. 준형이가 눈물을 보이니 나머지 세 명의 표정이 영 편치 않다. 개중 똘똘한 환규가 요목조목 있었던 일을 잘 설명하는데, 눈물을 쏟게 만든 쪽에서 또박또박 사건을 진술하니 못마땅했다. 내가 준형이 편이기 때문이 아니다. 급식 게임을 시작하려고 했는데 산통을 깨는 바람에 내 기분도 덩달아 상한 거다. 금방 해결할 거라 생각하고 얘기를 시작했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점심 식사 후 더 얘기하기로 했다.


 식사를 마치고 연구실로 4명의 학생을 불렀다. 늘 멍한 태규가 부식으로 나온 과자를 들고 왔는데 책상 중간에 두고 아무렇지 않게 먹기 시작했다. 환규 한 입, 성일이 한 입, 마지막으로 준형이 한 입. 서로 눈을 맞추더니 조심스럽게 웃는다.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선생님을 앞에 두고 폭소할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아서 웃음을 참는 기색이 역력하다. 나도 긴장이 풀렸다. 부식으로 나온 과자가 선생님보다 더 설득력 있고 끈끈한가 보다. 하나마나한 소리를 몇 가지 했지만 길게 잡아 두지는 않았다.

 "너희들이 생각해도 별일 아니지? 선생님이 더 말 안 해도 너희들이 해결할 수 있지?"

 앉아서 끄덕이더니 가라는 말에 네 명이 냅다 뛰어 나간다. 못 말리게 해맑은 뒷모습을 보며 나도 한 번 씩 웃는다. 그들의 즐거움에는 이유나 맥락이 없다. 이게 초등학생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가끔은 얄미워도 날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그 눈빛을 보고 있으면 단호한 것들이 사르르 녹아내린다.


1 휴지 한 장이면 충분합니다.

 창체나 체육이 든 날이면 학생들이 매일 따로따로 와 질문하는 게 '창체/체육 때 뭐해요?'다. 요즘은 간단하게 '급식 게임', '운동장', '강당'이라고 대답은 해주는 편이다. 같은 질문을 다른 학생들에게 네댓 번 들으면 심호흡을 깊게 하고 인내로 대답하지만 어제는 더 기대하라는 의미에서 활동 이름을 말해줬다.

 "오늘은 무림 고수 뽑을 거야."


 사실 이름은 거창하지만 단순한 게임이다. 코로나가 심한 시절 한 중학교 체육 교사의 유튜브(인더스쿨)에서 과제로 내준 걸 참고하여 게임으로 응용했다.

1단계에서 7단계까지 있는데 1단계는 박수를 앞뒤로 한번 치고 손바닥 위에 휴지를 올리는 거다. 단계가 올라갈수록 쳐야 하는 박수 횟수가 올라간다. 6-7단계는 앞뒤로 박수를 5번 치고 발등에 올리고, 발로 잡아야 한다. 학생들에게 설명해주며 시범을 보이는데, 이상하다. 분명 작년까지만 해도 어렵지 않게 발로 잡았는데 올해는 심통치 않다. 내가 바로 무림의 고수라며 잔뜩 무게를 잡고 시작했는데 체면이 말이 아니다. 아이들이 비웃기 시작했지만 금세 말을 바꿨다. 그 무림의 고수가 후계자를 찾고 있는 중이고 오늘이 그날이라고.


 개인적으로 연습을 시키고 10분 뒤에 반에서 모여 급식 게임을 시작했다. 각 모둠에서 한 명씩 나와서 1단계부터 차례대로 올라간다. 먼저 탈락한 모둠에게 가장 낮은 점수, 마지막까지 남은 모둠에게 가장 높은 점수를 줬는데 애들도 썩 잘하진 않았다. 아마 휴지가 세 겹 네 겹 짜리라 무거웠던 거 같다며 서로 합리화했다.


2 따뜻한 눈길 한 줌과 새싹

 초등학교 선생님이 다재다능해야 한다고, 적어도 부지런은 해야 한다고 느끼는 게, 9개 내지 10개가 넘는 교과목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인 건 초등학생은 정말 작고 사소한 거에도 흥미를 보이는데 예를 들면 각기둥을 배우면서 상자 과자를 같이 먹는 것, 교과서 속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바꿔 불러주는 것 등이 있다. 식물이나 동물을 재배하고 키우는 것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편이다. 올해 학생들은 유독 무순 기르기에 관심이 많은 거 같았다.

 이렇게까지 매일 관찰하고 살펴보는 애들은 없었거늘 옹기종기 모여 자기 꺼 한 번 친구 꺼 한 번 보는 뒷모습이 아기자기하다. 학생 몇 명은 무슨 비밀 얘기를 하듯 '선생님, 근데 싹 주변에 털이 났어요'하며 내 자리까지 와서 소곤거렸다. 좋아해 주는 모습을 보니 준비한 게 무순이라 너무 미안했다. 꽃을 피울 수 있거나 성장 기간이 더 긴 식물을 재배했다면 자지러졌을 것이다. 아쉽게도 6학년 선생님들 중 재배에 능한 분이 없어 실패하지 않을 무순을 선택했더랬다. 무능력에 불성실이다. 가까운 곳에 화훼단지도 있건만 개인이 하나씩은 못해도 모둠이 하나씩 키웠으면 재밌지 않았을까.


 아이들이 무순을 사랑한다는 걸 작은 무순들도 알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이틀 차, 내가 준비했던 무순과 아이들의 무순을 비교하니 확연히 달랐다. 그 눈길이 하도 따뜻하여 싹을 먼저 내어주지 않으면 안 됐나 보다.

내가 준비한 것 / 학생이 준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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