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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yu May 23. 2022

장범준 노래는 안 틀어요

 우리 반은 매달 플레이리스트를 만든다. 전 날에 주제를 알려주면 그 주제에 맞는 곡을 사유와 함께 적어 제출하면 된다. 곡 종류나 장르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사유만 적절하면 어떤 곡이든 틀어준다. 물론 욕설이 등장하거나 외설적인 내용이 나오는 노래는 제외다. 6학년이라 재치 있게 꽤 잘해서 A.K.A 'DJ 뀨(나)'도 빵빵 터진다. 다달이 찾아오는 이 시간을 정말 좋아해 줘서 고맙다. 라디오를 자주 듣는 어른들에게는 뻔한 활동일 수 있으나 하다 보면 라디오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상호작용이 상대적으로 더 활발하고 이런저런 얘기들을 많이 나눌 수 있는 게 장점이다.


 이번 달은 자유 주제다. 그래서 사연 신청이 많았다. 사연은 별명을 쓸 수 있다. 이번 달도 기상천외한 닉네임이 많다. '앙 나 츕팝츕스 포도맛 핌ㅋㅋㄹㅃㅃ', '화장실 요정', '월요일 좋아'가 대표적이다. '앙 나 츕팝츕스 포도맛 핌 ㅋㅋㄹㅃㅃ'은 처음에 무슨 말인가 했다. '판다'의 활용형인 '팜'을 잘못 쓴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피다'의 활용형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담배 대신에 포도맛 사탕을 핀다는 얘기인 거 같다. '화장실 요정'은 신청곡이 '내 똥꼬는 힘이 좋아'였다. 엉뚱한 제목에 유튜브에 떠돌아다니는 노래라 생각했는데 무려 유세윤이 부른 대중가요였다. '월요일 좋아'는 우리 반에서 매주 월요일에 틀어주는 노래라 아이들이 지겨워했지만 난 뿌듯했다. 내 세뇌가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별명은 '세상이 아주 시크릿 쥬쥬 핑크퐁이지?' 였는데, 저번 달에 등장한 어마어마한 신조어였다. 한국적 해학과 현대 문학적 표현이 어우러져 온고지신의 정신을 뽐내는 말이다. 한창 배를 잡고 폭소하고 있는데 그다음 신청곡이 눈에 띄었다. 벚꽃 엔딩. 장범준은 전 애인이 좋아한 가수라 못 틀어준다고 얘기하니 아이들 반응이 더 웃겼다. 위로와 조롱과 걱정이 섞여 유쾌한 것이 꽤 훌륭한 맛을 내는 트로피컬 주스 같았다. 정체는 알 수 없으나 다양한 열대과일이 적절히 배합된 그 음료.


 문제는 저번 달에 분명히 얘기했었는데 이번 달에도 벚꽃 엔딩이 떡하니 종이에 적혀있었다는 거다. 신청 사유가 '선생님 기운 내시라고 신청합니다'였다. 갸륵한 마음에 눈물이 핑 돌 뻔했다^^.

 "야, 선생님 아니고 DJ 뀨가 헤어진 거야!"

 짓궂은 장난에 떠들썩해진다. '선생님 울겠다', '얘들아 이건 좀 아니야', '선생님, 벚꽃 엔딩 꼭 듣고 싶어요' 등 오랜만에 활기찬 모습이 보기 좋다.


 플레이리스트에는 4-5곡 정도가 뽑혀 그 이름을 올린다. 그 후 플레이리스트의 제목을 정하는데 이번 달 제목은 'DJ 뀨의 슬픈 이야기...ㅠ'이다. 점의 개수와 자음 'ㅠ'를 붙여 달라는 세심한 요구도 있었다. 이제 매달 벚꽃 엔딩을 듣자며 자기들끼리 즐겁다. 그럼 뭐해, 난 안 틀어줄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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