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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귤 May 14. 2022

송홧가루 주의보

Yellow Alert

문제은 그것이었다. 송홧가루.


평지에서는 벚꽂엔딩이 한창이던 늦은 봄. 휘날리며 흩날리던 노란 가루가 울려 퍼지던 산.

사흘을, 80여 km를, 떠돌고 난 다음 날. 일어날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첫째 날, 일어났는데 눈 붓기가 평소 붓기가 아니다. 흰자 실핏줄이 존재감을 당황스럽게 드러내고, 새로운 생명체가 잉태되는 듯한 고통이 눈가에서 느껴진다.


산에서 봤던 실개미가 등산화 속에 숨어서 우리 집까지 온 거지, 그리곤 가장 말랑해 보이는 눈알에 들어가 둥근언덕 위에 집을 짓고 알을 잔뜩 낳은 것이야. 그리곤 곧 태어날 애벌레에게 먹일 먹이를 찾아 가장 높은 곳에서 아래까지 오르내리며 먹기 좋은 세포를 톱아보다 곧장 뜯어내 통각으로 자신들의 존재감을 전달해버렸어.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다가 병원에 갔다.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는 ‘극 자연치유 주의자’는 말도 안 되는 생각 때문에 병원을 갔다.


안경도 렌즈도 없이 들어간 안과 진료실, 마이너스 시력을 가진 사람의 시야에 의사 선생님 이목구비가 흐릿하게 보인다. 근엄한 목소리를 가진 선생님은 마치 나를 구원해줄 신처럼 여겨진다. 신을 믿지도 않으면서.


“ 자, 의자에 허리를 주욱 붙이고, 이마와 턱을 여기에 쭈욱 붙이세요”


중후한 목소리를 가진 신은 돋보기 달린 상자에 얼굴을 넣으라고 한다. 겁먹은 것을 들키기 싫어 일부러 허리를 당당하게 피고 어깨가 말리지 않게 목만 비죽했다. 돋보기에 비친 확대된 동공이 궁금하다.‘정말 개미가 살고 있나?’


나의 병명은 ‘개미 정착’이 아닌 ‘알레르기성 결막염’


개미는 없었다. 평소 오래 끼는 렌즈 때문에 각막에 상처가 났고, 상처에 꽃가루가 들어가 염증이 났다고 했다. 선생님은 앞으로 매년 이맘때가 되면 눈이 간지러울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 사주는 듣고 싶은 것만 들을 수 있는데 의사 선생님 말은 그럴 수가 없다. 건강할 때 방치한 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며, 산에서 뿔 달린 썬글라스를 쓰고 다니는 등산 고수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음을 이마를 '탁'치며 깨닫는다.


초록색 하얀색 뚜껑. 안약 두 개를 처방받았다. 하루에 세 번, 그 뚜껑을 열어 눈에 넣어야하는 숙제를 받았다.


먼저, 초록 뚜껑 약을 흔들어서 눈에 넣는다. 눈 밖으로 다 나오는 것 같은데 흡수되는 거 맞아? 의심한다.

두번째, (정확히) 5분 뒤에 하얀 뚜껑의 약을 넣는다. 작게 오므린 구멍을 비집고 나온 한 두 방울 하얀 액체가 눈에 들어가니 더 따끔따끔 아프다. 다친 무릎에 빨간약을 바르면 느껴지던 쓰라림이 눈에서 난다. 

마지막으로, 안경 처방을 받았다. 맙소사 ‘안경’이라니




둘째 날, 안경 낀 벌건 눈이 출근한다.


안경.. 아, 난 안경 끼는게 너무 싫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20년이 넘게 안경을 끼면서 시력은 점점 더 안 좋아졌는데 세월만큼 무거워진 안경은 눈을 작게 코를 무겁게 만든다. 만화영화에는 안경을 벗으면 ‘샤랄라’ 얼짱이 되는 주인공이 있다. 나는 얼짱은 아니고, 그냥 얼굴이 완전 짱 변한다.


거울 속 충혈된 눈을 보니 안경을 끼는 것은 어른의 자세임을 알고 '안경 나'를 '렌즈 나'처럼 보완해보기로 한다. 평소보다 공들여 출근 준비를 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5분간 헤어트리트먼트도 했다. 뜨거운 바람과 차가운 바람을 섞어 볼륨이 살아나도록 머리를 말리고, 스팀다리미로 옷을 빳빳이 다려 안경을 낀 지적이고 단정한 회사원 이미지를 살려본다. 마지막으로 안경 장착! 아, 뭔가 태가 살지 않는다.


사람 몸에서 눈 비율은 1% 도 안 되는 것 같은 데,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나 달라 보이게 하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눈이 아프면 이렇게나 힘들다는 것도) 그러나 놀랍게도 안경 끼면 사람들이 나를 ‘못’ 알아본다. 엘리베이터에서 출근시간이 겹쳐 줄곳 인사를 주고받던 아래층 이웃은 그날 나를 몰랐다. 나를 찾아온 회사 후배 A는 고개를 돌린 나를 보며 1초 깜짝 놀랐다가 아닌척한다.


선배 B : “너.. .......원래 안경 꼈었나? 귀엽다 하하”

나 : “아니요”(정색)


그래서 안경 끼기가 싫다.





여섯째 날,  왜지? 더 심해졌다.


거미줄 친 눈곱들을 보니 놀람교향곡이다. 갑자기, 불현듯, 평생 안경을 껴야만 한다는 두려움이 몰려온다. 며칠 전 정수리에 뽕긋 난 긴 흰머리를 처음 뽑은 기억이 난다. 아, 노화의 시작이구나. 회복도 더뎌지는 것이로구나. 두려움을 잊게 하는 깊은 노화의 좌절.


다른 병원에 간다. 평소라면 산에 있었을 주말 아침. 꺼벙한 안경 눈으로 북적이는 병원 의자에 앉아있다.


인자한 목소리의 새로운 의사 선생님은 이번에도 박스에 얼굴을 넣어 보라 했다. 허리는 굽고 어깨도 말린 채로 겁에 질린 얼굴로 상자에 들이민다. 뭔가 억울한 사연을 가진 사람처럼 지난번 처방받은 안약도 두 주먹에 꼭 쥐고 있다.


“여태까지 어떻게 버텼어요? 이걸로는 안됐겠는데..”


엉덩이에 스테로이드성 주사를 따끔히 맞고, 끼니마다 먹어야 하는 총천연색의 알약들,  그리고 두 번에서 네 번으로 늘어난 안약 숙제를 처방받았다.




집에 돌아오니 병들고 고독한 적나라한 인간이 된 것 같아 서럽다. 강아지 ‘오구’를 품에 꼭 안고 낮잠을 잤다. 검게 꽉 찬 오구 눈동자에 비친 내 검은 모습. 외롭다. 처량한 꿈을 꾸다 출출해지니 퉁퉁 부은 눈이 떠진다. 허리가 알아서 몸을 세우고 팔이 알아서 냉장고를 연다. 텅 비어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냉장고에 고기와 회가 있다.


병원 다녀왔냐는 엄마 말에 잠결에 “나................ 주사 맞았어..” 우물거린 기억이 난다. 

엄마가 ‘항’상 건강하자 '항'정살과 ‘회’ 복 하자 '회'를 채워둔 것이다. 


입은 안 아프니까, 먹자 항상 그랬던 것처럼 힘내서 회복하자.

일회용 버너를 켜서 뜨끈하게 돌판을 데우고 기름진 고기를 ‘치익’, ‘치익’ 굽는다. 하얀 꽃을 가득 머금은 항정살에게 최선을 다한다. 고기가 익는 동안 회를 둘러싼 랩을 조심스럽게 뜯어낸다. 천사채 위에 얹혀진 살점들은 하얗고 빨갛고 보기만 해도 군침이 난다. 나는 고기와 회를 한번에 먹기로 결정한다.


뜨겁고 차가운 녀석들의 공통 친구도 준비됐다. 바로 주말농장에서 갓 따온 푸른 잎! 손바닥보다 커다란 싱그러운 초록 상추, 그 위에 엽록소를 조금 더 머금어 진 초록을 뽐내는 깻잎을 얹는다. 이대로 뭔가 아쉬워 냉장고를 뒤적여 지난봄 시장에서 구매한 뿌리가 알찬 달래와 무르익어 축축해진 파김치를 얹는다. 고추냉이를 살짝 얹혀 마무리! 이쯤 되니 주객이 전도된 쌈. 내입에 살뜰히도 들어간다.


상추의 기분좋은 까끌거림과 깻잎의 부드러운 솜털에 한번에 감싸진 고기와 회. 뜨거움과 차가움의 이질적임은 달래와 파김치의 알싸한 향긋함을 감싸며 처참히도 부서진다. 갑자기 톡 쏘는 녀석이 있다면 그건 인생에 찾아오는 따끔한 맛이다. 그 톤온톤 배색 맛이 마음에 든다.


이번 주는 초록에 가지 못해 아쉽지만 입안은 초록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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