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오봉에서 도봉산 신선대까지
평소 다니던 길이 아닌 낯선 길이라는 건 한참 걷다가 깨달은 사실이었다. 지도를 보려 스마트폰을 켜니 보조배터리만 가져오고 케이블은 안 가져온 탓에 배터리는 4%를 가리키고 있었다. 되돌아가기 너무 먼 길임에 지나간 이들의 자취를 믿고 걷기로 결심했다. 결심과는 다르게 따뜻했던 공기가 갑자기 서늘하게 느껴진다. 서늘한데 등에서는 땀이 난다. 고요함은 온도가 없을 텐데 땀구멍에서 나온 체온이 묻은 수분을 급격히 식힌다.
평소보다 발바닥이 평지에 닿는 시간을 적게 하여 발을 재촉한다. 발 끝에 닿는 돌멩이가 예민하게 느껴진다. 걷다 보니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순식간에 오래전에 어디선가 들었던 서울에도 반달 가슴곰이 산다!라는 말이 떠올라 마음이 더욱 서늘해지는데, 그 정체 모를 기운이 같은 종족인 사람임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안전한'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하려 온 말초신경을 집중하여 파악한다. 그가 완전하고 안전한 사람임을 확신한 후 “사람 다니는 길처럼 생겼는데 완전히 사람이 다니네” 시답지 않은 말을 하며 긴장한 온몸을 두 팔로 토닥토닥인다.
내가 지나 온 길은 알고 보니 샛길이어서 등산객이 적었다. 그러나 길 바로 옆에 계곡이 있어 물소리를 시원하게 들으면서 걸을 수 있는 길이었다. 안도감이 찾아온 뒤 청각이라는 감각이 비로소 회복된다. 마침 10km가 넘는 산행으로 지친 터, 물소리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계곡으로 내려가 본다. 이제는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계곡에 앉아 쉬는 얼굴로 꽤 많이 보인다. 어떤 부부는 집 반찬이 가득 담인 락앤락 통을 꺼내 반짝이는 은색 돗자리에 앉아 내 얼굴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양푼에 맛깔난 쌀밥을 싹싹 비벼서 나눠 먹고 있다. 분명 들기름에 볶은 고소한 나물과 달큼한 쌀밥, 맵싸한 고추장 향이 어우러지는 냄새가 날 것이 분명하다. 침이 꼴깍 넘어가며 허기가 진다.
나도 편안해 보이는 적당한 돌에 앉아본다. 물속을 보니 까맣고 작은, 쉴 새 없이 꼬리를 흔들며 물살을 이겨버리겠다는 의지를 가진 올챙이들이 있다. 조심스럽게 발을 담가서 올챙이가 발 위에 내 발을 바위라고 착각해 보기를 기대해 본다. 그러나 올챙이는 영리하다. 소금기를 머금은 뜨겁고 축축한 발을 차갑고 촉촉한 냇물에 잠깐 식히니 마치 갓 태어난 것처럼 생생해진다. 손수건을 물에 푹 적셔 물을 네 개나 메고 온 어깨에 둘러본다. 물기를 더 깊숙이 느끼려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봄이 지나간 마지막 흔적이 보인다.
눈을 감아 본다. 하나의 감각을 멈추면 다른 하나의 감각이 더 살아날 수 있을까. 내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경이로운 흔적이 있을까 하는 욕심으로. 핸드폰은 꺼졌고, 나는 길을 잘못 들었지만 그래서 더 행복하고 조금은 졸린 오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