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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귤 Jun 03. 2022

가성비에 대하여

동네 뒷산 계양산에서

바빠서 설악산에 가지 못했다. 설악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일주일 전부터 단단히 준비했는데 여간 아쉬운 게 아니다. 뚜껑 돌리는 것을 까먹고 식탁 위에 올려둔 미지근하고 덜더름한 콜라처럼 김은 빠질 때로 빠졌지만 아무리 바빠도 산은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시간 대비 성취감이 높은 ‘가성비’ 등산을 하기로 한다.


오늘의 산은 계양산이다. 우리집에서 내가 좋아하는 도봉산, 북한산에 가려면 들머리까지 적어도 편도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걸린다. 산행 시간이 대중교통 왕복 시간보다 짧거나 비슷하다. 긴 시간 지하철 안에서 시간을 보내면 가는 동안 진이 빠져 다시 집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도는데, 이런 의지의 저항 없이도 계양산은 집에서 버스 타면 30분. 상대적으로 쉽게 갈 수 있는 산이다.


어깨에 멜 수 있는 작은 패커블 가방에 한병의 물을 챙겨 넣고 도착한 계산역 앞. 새벽이 갓 가신 이른 아침인데 아침 공기 마시러 온 등산객들은 벌써 옹기종기 모여있다. 계양산은 계단이 726개나 돼서 계단산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계양산 등산 코스가 여러 가지이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스는 바로 이 726 계단 코스다. 쉬지 않고 30분에서 40분 부지런히 계단을 오르면 뾰족한 철탑이 보이는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 726개의 계단을 걷다 보면 계단을 오르는 두 다리와 정신이 분리되어 명상하는 기분이 든다. 낙산사 템플스테이에서 백팔배 했던 기분이다. 땀까지 쭉 나니 최고의 운동효율을 느낄 수 있다.


오늘 정상까지 걸린 시간은 33분. 몸에 비해 긴 두 팔을 뒷짐 지고 계단을 '챱챱' 치고 오르면 발바닥이 나무계단에 '찹찹' 달라붙는다. 그 기분이 참 좋다. 이제 다리가 오르막에 익숙해지니 청각이 제 감각을 회복하는데 주위에서  '뿅뿅'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새소리 인가 싶어 주변을 둘러본다. 뿅뿅이 신발을 신은 어린아이가 열심히 계단을 오른다. 아이와 얼굴이 비슷한 두 어른도 열심히 산을 오른다. 부부는 형광색 양말을 신었고 아이는 형광색 모자를 썼다. 서로가 서로에게 형광을 묻혔다. 눈이 마주친 그들에게 시대의 그라데이션이 느껴진다.


계양산의 정상에는 이곳을 세상의 중심을 두고 전 세계를 아울러 볼 수 있는 지도가 있다.

계양산, 내가 서있는 여기에서 하와이까지 7,577km. 내가 오늘 오른 700여 개의 계단과 7000여 미터의 거리를 가늠해보며 멀리 있는 하와이를 향해 마음속으로 '야호' 외친다.


계양산에는 토끼도 살고 있다.




계양산의 또 다른 매력 포인트는 '전통시장'이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 수 없지. 하산 후 전통시장 구경은 놓칠 수 없다. 이 시간 즈음되면 시장에는 떡에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전은 기름에 지글지글 부쳐진다. 시장에는 다가온 주말, 가족과 맛있는 음식을 나누기 위해 아침을 재촉한 사람들의 다정한 목소리와 발자국이 가득하다.



매주 들르는 '못난이 꽈배기'에서 유자 꽈배기를 한 개 산다. 기름에서 갓 나온 뜨거운 그것을 호호 불어 한입 베어 문다. 운동한 나에게 주는 달콤한 보상이다. 그 행복한 대가는 천 원이다. '생활의 달인'에 나왔다는 찹쌀 꽈배기 가게에서 엄마가 좋아하는 찹쌀 꽈배기를 3천 원어치 산다. 설탕은 반은 묻히고 반은 안 묻혀서. 기름진 동그라미에 묻은 설탕은 반짝이는 행복이다.

 

버스 안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주말 햇살 아래 꾸벅꾸벅 졸며 도착한 집. 평소의" 엄마! 나왔어!"가 아닌 "어~머니~저 왔습니다~" 하고 능청스레 현관문을 열면 제 먹을 건 없는 우리 집 강아지 '오구'가 꽈배기 냄새를 맡고 뛰어온다.





계양산은 거리, 운동, 맛집까지 완벽한 '가성비' 를 선사한다. '가성비' 나는 사실 이 단어를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 처음 이 단어는 결코 나아지지 않는 경제 상황, 신문 속 보다 더 팍팍한 개개인의 살림살이에서 적은 비용으로 큰 효용을 느낄 수 있다는 긍정적 의미로 등장했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동물은 염세적 비관론에 빠지는 것을 참 좋아한다. 널리 살림살이를 이롭게 하라는 의미로 만들어진 어원이 참된 의미를 잃기는 쉬웠다.


가성비의 '실체'를 밝혀라, '가성비충', '가성비 남 혹은 녀', '가성비 선물' 인터넷에 떠도는 가성비 단어 뒤에 붙은 조합어는 긍정적이기는 커녕 부정적 의미로 더 크게 확산됐다. 그래서 가성비가 붙은 말을 들으면 마음이 불편했다.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런 물건을 준다는 것이 죄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결국 가성비라는 단어를 들으면 괜히 촉수가 곤두서는 지경이었다.


가성비, 왜 불편한 걸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결국 가격이 붙어서가 아닐까, 세상은 돈을 제외하고는 여유도 기회도 행복도 논할 수 없는 세상이 됐지만 가격으로 평가될 수 없는 것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가성비를 대체할 단어가 없다면 가성비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 아니 의미를 바꿔야하나? 나는 스스로 가성비라는 단어를 가격대비성능이 아니라 '가장 성공할 수 있는 비밀' '가치있고 성장동력이 되는 단비' 라고 생각하기로 결정했다.


3박자. 모든 면이 완벽한 계양산은 '가성비'가 붙었을 때 그 단어가 가진 긍정적 역할을 충분히 다 한다. 봄이면 진달래가 만개하고 가을이면 단풍이 장관이다. 오르기 어렵지 않기 때문에 남녀노소 세대가 넘나드는 건강한 기운이 가득하다. 2021년 지난 한 해 계양산에 간 날은 13회였다. 13번의 치열하고 바쁜 현생을 살면서 틈틈히 성취감을 주었던 산. 계양산은 삶의 중심이 흔들릴 때마다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던 감사하고 아름다움이 가득한 장소다.


가성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바쁜 와중에도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는 산이 있어서, 부담 없이 나가서 걸을 수 있는 공원이 있어서, 시끄럽지 않고 심지어 아침에 일찍 여는 작은 카페가 있어서, 힘든 날 고생한 나를 위로할 수 있는 고소한 빵이 있어서, 호주머니에 넣어다니다가 입에 쏙 넣을 수 있는 작은 초콜렛이 있어서, 가방에 쏙 넣어 다니다가 지루한 순간 킥킥 작은 웃음을 내며 읽을 수 있는 활자 책이 있어서.


삶은 매번 큰 행복만 느낄 수 없기에 작고 소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가성비들은 의도치 않게 찾아오는 실패와 슬픔, 우울과 함께 살아갈 힘을 준다. 가성비가 가진 좋은 의미, 그리고 내가 새롭게 정의한 가성비. 깍아내려지기엔 너무 소중하고 고마운 단어다. 앞으로도 나는 나의 가성비를, 이 산을 참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겨울에는 귀여운 눈사람이있고
가을에서 여름까지 한결같이 아름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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