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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귤 Jul 15. 2022

현숙 씨 그리고 현옥 언니

정족산, 그리고 그것이 둘러싸고 있는 곳에서

강화도 푸른 바다는 정족산을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정족산은 삼랑성을 둘러싸고 있다. 그 산성은 전등사를 에워싸고 있다. 나는 그리고 전등사에 갔다. 그리고 정족산에 갔다.


꿈인가, 눈앞이 상념이 공상으로 변했다가 몽상으로 바뀌었다가 숨이 턱 막히는 느낌에 눈이 움찔 떠진다.  창문 하나 없는 한 여름 온돌방. 콘크리트 벽에 잘 바른흰색 한지 벽지가 뿜어내는 열기에 온도계를 보니 빨간 실선이 숫자 30을 넘어서고 있다.


무거운 머리를 들어 나에게 주어진 3평 남짓한 작은 방을 둘러보니 어릴 적 이빨 빠진 찰옥수수를 먹던 할머니 댁 사랑방이 떠오른다.

혼란의 상실을 위해 찾아온 불확실하고 낯선 공간에서의 하룻밤. 그러나 시골집 특유의 노란 장판에서 느껴지는 뜨거움은 상실은커녕 마음을 더 산란하게 만들기에 이러다간 갓 지은 밥의 누룽지, 아스팔트에 눌어붙은 계란 프라이가 될 것 같다. 덜덜거리며 뜨거운 바람을 뿜어내는 선풍기를 바라보다가 벌떡 일어나 문을 열어젖힌다.


바깥세상은 며칠째 그치지 않는 장맛비로 맑은 물에 흰색 물감을 한 두 방울 떨군 것처럼 뿌옇다. 특별한 목적 없이, 제멋대로 걸을 수 있는 자유가 태어나 처음 주어진 것 마냥 사찰을 걷는다. 부연 안개 덕에 도량을 둘러싼 이름모를 풀들의 초록 원경과 근경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진다. 산을 가득 채운 구불구불한 소나무는 끝이 보이지 않아 신비롭고 보이지 않는 공간이 내뿜는 시원한 솔내음은 세상의 향이 아닌 듯하다.

잘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선명한 물소리가 들린다. 일정한 박자감을 가진 그 소리는 세상 소음으로 독을 잔뜩 머금은 탁해진 달팽이관을 청소한다. 초록의 신비다.


이제 돌아가 볼까, 발길을 돌리다가 어떤 것을 발견한다. 그것이 놓치지 않고 시야를 꼭 붙잡는다.

‘등산로‘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오후 1시. 바쁜 것이 정상인 도시의 시간. 이곳은 바쁜 사람은 없고 물방울과 바람만 존재한다. 나는 두 눈을 꼭 붙잡은 그곳을 놓치지 않기로 결정한다. 바다가 둘러싼 불확실함이 가득한 정족산을 오르기로 한다.



다섯 계단 위 세상이 보이지 않는다. 오르막 끝이 어디인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의문도 가지지 않은 채 걷는다. 얼마나 올랐을까, 갑자기 희부연 공기 속에서 사람 둘의 실루엣이 경계 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등장한다.


그때 나는 현숙 씨를 만났다. 현숙 씨는 비바람을 맞아 엉망이 된 채 등장한 익명의 여인에게 경계 모드를 막 시작하려는 그 여인을 안심시켜주겠다는 결심이었는지 '안녕하세요'라고 말했다. 대답도 하기 전에 빠르게 지나갔다.


현숙 씨 둥근 어깨에는 늘 ’우리 숲 사랑‘ 천가방이 걸려있다. 초승달 모양으로 그늘지는 눈가 주름은 아들을 바라볼 때마다 그 모양으로 웃음이 접힌다. 목소리에는 추운 겨울 빨개진 손끝에 닿는 핫팩처럼 따뜻함이 담겨있다.

다정한 현숙 씨 옆에는 ’모아이 석상‘ 같은 아들이 있다. 아들은 한 번도 활짝 웃는 적이 없어 모아이 석상 같았다. 산에서 처음 만날 때에도 아들은 그녀 뒤를 표정 없이 묵묵하게 뒤따르고 있었다. 돌처럼 묵직하고 든든하게 엄마 옆을 지켰다


그녀와 그는 2박 3일 템플스테이를 왔다.

나중에 이야기를 나누며 알게 된 여러 가지 아들에 대한 반전은 나를 놀라게 했다.

당연히 다정하고 활동적인 현숙 씨가 주최하여 온 줄 알았던 템플스테이는 알고 보니 아들의 주최 아래 혼자 가기 영 쑥스럽다는 이유로 어머니와 함께 온 것이었다. 사춘기 소년들이 의례 가지는 침묵을 가지고 있기에 그 정도 나이이겠구나 짐작했거늘, 그는 20대 중반이었다. 한 번도 웃는 적은 없었지만 고양이를 좋아해서 엄마를 뒤따라오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일이 흔했으며, 숙소에서 걸어서 10분이 걸리는 식수대에 가기 위해 엄마와 가위바위보를 했고 지면, 이겨도 갈 것처럼 묵묵히 물병 두 개를 찰랑거리는 사람이었다.

작약을 보며 "우와~참 색이 예뻐요"라고 내가 말하면 옆에서 듣고 "진짜 색이 여. 러. 가. 지. 다"라고 모아이 석상처럼 말했다. 빨간 보리수를 난생처음 맛보며 그 시큼 털털한 맛에 놀라는 나를 보고 미세하게 웃었고 매 끼니마다 산처럼 밥을 쌓아오는 나를 보고 미간은 항상 놀란 기운이었지만 겉으로는 모른척해주는 사람이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누군가가 있다는 안도감에 부연 길을 재촉하며 템플스테이 사무소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현옥 언니를 만난다. 그녀와의 첫 만남은 강렬했다. 잔잔한 꽃이 그려진 예쁜 배낭을 메고 눈에는 연보라색 쉐도우로 물들인 그녀. 조심스럽게 문을 열던 그녀의 첫 음성이 생생하다.


"어머~~~~~~~실례합니다~~~~~안녕하세요~~~~~~~~! 누구 안 계세요?"

하얗게 내려앉은 머리칼에 비해 목과 코 안에서 나오는 음에는 청량함과 싱그러움이 가득했다.


어색하게 둘이 앉아 사무국 선생님을 기다리는데 그녀손톱에 물 맑은 주홍색이 보였다.

"어머 봉선화 하셨네요."

그녀는 마음이 번잡할 때마다 손가락에 500원짜리 인스턴트 봉선화 물들이기를 구매한다고 대답했다. 손톱 틈틈이 삐져나오지 않게 집중하다 보면 세상 걱정을 잊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엄지와 중지는 물들지 않았다. 아마 엄지와 중지까지는 번잡하지 않았던 겔까.


반대편에서 돌아와 어느새 우리 옆에 앉은 우리 숲을 사랑하는 가방을 멘 현숙 씨도 자신도 때마다 봉선화를 따와서 백반을 직접 빻아 물들인다고,  오므려진 씨앗 바구니를 톡 따면 우수수 팝콘처럼 생명을 튀기는 이 꽃을 피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여름 재미라고 현옥 언니 말에 덧붙였다. 그녀들은 뜨겁고 습한 여름을 즐길 줄 아는 손가락에 주홍색을 물들일 줄 아는 감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현옥 언니는 고운 사람이었다. 새벽 예불이면 가장 먼저 도착해 사람들에게 방석과 책자를 나눠주는 사람이었다. 나무에서 툭 떨어진 새를 발견하곤 잘 보살펴 안전한 곳에 옮겨주고 다음날 다시 보러 가는 사람이었다. 그녀 고향은 강화도라고 한다. 국민학교 시절, 걸어서 전등사에 소풍 온 기억이 생생한데 이곳에서 보물 찾기도 했다고 했다. 전등사는 그때의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고 회상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떨림이 담겨있었다. 마음이 부산하여 내일 템플스테이가 끝나면 자신의 고향으로 걸어갈 것이라고 했다. 이 여름에 걸어서 3시간 거리를 걸어갈 것이라 말하는 그녀의 말에는 어떠한 담담함이 담겨있었다.


현옥 언니와 현숙 씨 그리고 나는 하루 동안 친구가 됐다. 현숙 씨는 나의 엄마 정도 나이, 현옥 언니는 현숙 씨의 엄마 정도 될 나이라고 짐작한다. 그런데 우리는 현옥 씨를 현옥 언니라고 불렀다. 그녀도 그렇게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여자 셋은 때가 되면 창문을 바라보며 말없이 밥을 먹었고 설거지할 동안 문 앞에서 서로를 기다렸다. 일과가 끝나면 묵묵하게 잡초를 뽑았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냥 잡초를 뽑았다. 그것이 마음의 잡초라고 생각하며 뿌리 뽑았다. 현옥 언니는 인간 호미처럼 잡초를 훌렁훌렁 뽑아내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들은 식물 도사였다. 어느 것이 무슨 이름을 가졌고 어느 풀을 건들면 무슨 향이 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더덕과 머위가 어떻게 생겼는지, 태어나 처음으로 감나무 밑에 자란 잡초의 이름을 알고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코스모스와 물망초를 보았다.


풀이름과 구름 모양, 나무 끝에 달린 빨간 보리수와 잘 익은 매실을 보며 함께 자연의 경의로움 느꼈지만 우리는 어떤 번뇌를 가지고 이곳에 닿았는지 묻지 않았다. 템플스테이 사무국에서 나눠준 설문조사에서 나이를 체크할 때 엿보지 않았다. 비 내리는 산을 왜 혼자 걷고 있는지, 밖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것을 가졌는지 묻지 않았다. 다만 새벽 예불 마무리로 서로의 왼쪽과 왼쪽 가슴에 담긴 심장을 맞닿으며 "사랑합니다"라고 말했고 서로의 어깨가 닿았을 때 조금은 더 꽉 안아주었다. 그 순간 눈 끝에 매달린 눈물을 보았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긴 장마가 무색하게 날이 말끔하게 갠 다음 날, 집에 돌아와 따 먹어도 좋다는 주지스님의 허락 아래 현옥 언니가 챙겨준 매실과 보리수 열매를 엄마에게 자랑한다. 엄마의 눈가에 자리 잡는 주름은 현숙 씨를 떠오르게 한다. 시큼털털한 것을 왜 이리 많이 따왔냐며 절에서 나누어준 시루떡을 함께 먹는다. 세 시간 거리의 고향을 걸어서 떠난 현옥 언니는 잘 갔을까. 그녀의 작고 담담한 발걸음은 목적지에 무사히 도달했을까. 밥을 먹은 뒤 함께 골랐던 색색의 사탕 중 노란 비닐에 잘 싸인 호박엿을 입에 넣으며 주홍색이던 그러나 잡초를 뽑느라 엄지와 검지 끝이 검은색이 된 그녀의 손끝이 떠올린다. 모아이 석상 같았던 그러나 다정함을 알고 있는 현숙 씨의 아들과 우리 숲을 사랑하던 현숙 씨가 떠오른다. 그녀들을 떠올리며 나도 손 끝에 주홍색을 물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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