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귤 Oct 24. 2022

한라의 초록

한라산에서

거리마다 향긋하게 퍼지는 만감류의 싱그런 주황 내음, 펄펄 끓어올랐던 용암이 차가운 바람에 식어 뽕뽕 구멍의 상흔으로 남은 현무암, 그 흉터를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어 예술로 세상에 내보인 하르방의 형상, 푸름을 간직한 바다 그 캔버스 위에 수묵화를 그린 검은 얼룩의 물미역, 그 얼룩을 부수는 파도.


제주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다 얼룩을 부수던 파도에 덩달아 부딪히고 부서져 둥글게 자란 조약돌만큼이나 많다. 제주 하면 제주바다를 떠올리기 쉽지만 제주는 초록의 땅이기도 하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제주에는 386개의 오름이 있는데 그것들은 오르락내리락 울퉁불퉁한 초록 굴절을 만들어 녹색 제주를 구성한다. 그중에서도 한라산은 제일가는 제주 초록이다.


한라산을 다녀온 사람은 다른 산과는 달리 조금 다른 초록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그 이유는 하나의 아파트에 각 층마다 다른 사람이 사는 것처럼 한라산의 수직, 해발고도에 따라 살고 있는 식생, 생동체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느 해발에는 여름엔 경쾌함을 간직하고, 가을엔 빨갛게 익다 곧 바스락거리며 자신의 몸을 단출히 비우는 낙엽활엽수림이, 어느 고도에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늘 푸름의 청량함 가진 소나무의 침엽수 식구들이 그리고 가장 높은 층에는 고립된 여건과 척박한 조건 속에서 살아남아 생명이라는 놀라운 것을 증명하는 고산 식물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


같은 계절 같은 공간이어도 각자의 땅에서 살아간 방식과 역사를 간직한 가지와 뿌리, 유기체에 뻗어나간 초록은 같은 초록색이어도 우리에게 다른 느낌을 준다. 그래서 한라산은 다른 산과는 다른 인상을 짙게 남긴다.


한라산은 우리나라의 산 중에서 가장 많은 식물을 볼 수 있는 산이다.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4,000여 종의 식물 중 지리산에는 1,300여 종, 설악산에는 1,000여 종 그리고 한라산에는 무려 1,800여 종이 자란다고 하는데, 한라산에 다녀오면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식물 중 절반에 가까운 것들을 볼 수 있다. 식물뿐만 아니라 그 식물과 더불어 사는 동물, 곤충, 미생물, 다양한 유기체가 모여 산다.


그리고 한라산에 찾아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등산객 중에는 거주민도 많겠지만 제주를 찾아온 수많은 여행자가 한라산을 찾는다. 한라산은 우리나라에서 즐길 수 있는 산 중에서 가장 다양한 지역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공간이다. 등산하는 시간 동안 우리는 다양한 말소리를 들을 수 있다. 다양한 억양의 한국말과 다양한 나라의 언어들. 같은 풍경을 보고 표현하는 수많은 목소리와 단어.


연륜의 흔적을 이마에 지니고 산을 오르시는 산악대장님들. 그들을 보면 젊음의 패기가 전부가 아님을, 한낱 스러질 젊음에 대한 나의 과신을 반성케 한다. 어쩜 그렇게 잘 오르는지 모르겠는 날 다람쥐 같은 아이들. 그들을 보면 그들이 지닌 잠재력과 가능성에 가슴이 벅차다. 나이가 지긋하게 보이는 손을 서로 꼭 붙잡고 산을 오르는 노부부, 그들을 보면 사랑이라는 것은 한때 지나가는 불나방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한라산은 모든 생명체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공간이다. 그곳에서 나는 모든 생명체가 서로를 공생하고, 의지하며 응원하고 성장하는 살아있는 에너지의 폭발음 같은 것을 느낀다.


예전엔 제주도로 여행을 갈 적마다 바라볼 것도 먹어볼 것도 너무 많아서 짧은 여행 일정에 등산까지 할 여유가 없었다. 핫플레이스, 인생 맛집, 인생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 빠르게 지나가는 유행에 휩쓸려 최대한 많이 그곳을 경험하느라 바빠서 오랜 시간 동안 누적된 자연의 역사를 들여 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핑크 뮬리도 도넛도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여유를 주기 위한 여행에서 나는 항상 여유를 가지고 돌아올 수 없었다. 한라산의 수많은 생명은 풍성한 싱그러움을 속삭인다. 그 소란스러움에는 여유가 담겼다. 그 소리는 초록색이다. 같은 공간이 주는 초록 소리는 계절마다 다르다. 봄과 여름엔 경쾌한 싱그러운 초록, 가을에는 모든 것을 털어낸 초연함 그러나 남은 아쉬움에 대한 바스락한 초록, 겨울에는 내년을 기약하는 묵음의 초록이 있다. 어린 시절 내 책가방 속 크레파스는 하나의 초록색만 있었지만 한라산에는 수많은 초록이 존재한다. 각기 다른 초록색 속에서 나는 가슴에 존재하는 우리의 서로의 초록을 발견하고 그것을 눈에 새긴다. 우리 눈에 남은 빛. 그것은 생명의 초록이다.




이전 04화 방탕한 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