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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귤 Sep 13. 2022

오르막 내리막

2021년 2월 13일 나의 첫 등산, 문수산에서

어린 시절, 새 학기가 시작되면 주 오일 시간표에 적힌 체육시간 숫자를 세며 인상을 찌푸린 기억이 선명하다. 초등학교 3학년, 처음 피구 했을 때도 생각난다. 뭔지도 모르고 들어간 흰색 네모 안에서 무자비로 날아오는 공을 보고 당황했다. 몸이 느린 탓에 시작하자마자 맞을 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눈물이 뚝뚝 났다.


머리가 커지고 나서부터는 어떻게 하면 체육시간을 피할 수 있을까 요령 피우기 급급했다. 때마다 돌아오는 체력테스트, 오래 달리기를 하면 한 바퀴만 뛰어도 목구멍에 진하게 맺히는 피맛에 "친구들아 먼저 가, 나는 안 되겠어." 영광의 마지막 주자를 자청했다.


학습된 운동 무기력은 성인이 되어서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20대 중반까지도 나에게 운동이란 빠르게 걷는 파워워킹, 헬스장에서 쭈뼛거리다가 겨우 하게 되는 러닝머신과 사이클, 가벼운 체조가 곁들여진 요가가 전부였다. 그런 운동은 지겹고 땀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땀이 안 나는 사람인 줄 알고 오랜 시간을 살았다.


등산을 아예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일기장에는 기억나지 않는 등산 이야기가 있다. 조숙했던 어린아이는 등산을 하며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던 것 같다.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 회사 동료들과 등산을 가보기도 했다. 등산 초보에게 추천한다는 서울 인왕산. 달리기와 헬스 피티로 기초체력을 다졌다고 생각했는데 끊임없이 이어지는 지옥 계단에 어린 시절 맛봤던 목 끝의 피맛을 제대로 회상했다. 그 이후 산은 바라볼 때가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며 푸른 산을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하기로 했다. 운동은 장비빨이라며 충동구매한 등산화와 스틱은 신발장에서 기약 없는 잠을 자며 사계절을 보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나는 혼자, 등산을 가게 됐다. 종교라면 과장되게 어떤 계시를 받은 것처럼, 오랫동안 쉬고 있는 장비들을 챙겨 집앞에서 버스 타고 1시간여 위치한 동네 뒷산 '문수산'을 갔다. 나는 mbti에서 극도의 계획형인 J형 인간이지만 그날은 굉장히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P적 사고 회로가 작동했다. 아직 새싹이 돋지 않아 등산을 시작하기도 적당하지 않던 2021년 2월 13일. 나는 혼자 산을 갔다.




혼자 산에 간 것은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문수산은 서울에 있는 산이 아니고 경기도 김포시와 인천광역시 강화도가 맞닿는 곳. 그 경계에 있는 외진 산이어서 서리가 가시지 않은 2월 그 산을 찾아온 등산객은 많지 않았다. 일단 왔으니까 가보긴 하는데 출발한 지 오분만에 눈앞에 펼쳐진 길은 정확한 길이 맞는지 아닌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혼자 영화보기, 혼자 쇼핑하기, 혼자 뷔페 가기, 혼자 하는 것은 모든 자신 있지만 그날은 온몸이 긴장해서 모든 감각이 곤두섰다. 그때 갑자기 낯선 이 가 말을 걸었다. 지금이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텐데, 순간적인 위협감에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리곤 곧장 앞만 보고 걸었다. 무서워서 심장이 뛰는 건지 힘들어서 숨이 차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헐떡이며 허겁지겁 도착한 정상.

나에게도 땀구멍이 있구나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흠뻑 몸이 젖었다. 정상을 마주하고 뒤늦게 찾아온 안정감에 허기가 밀려왔다. 집에서 야무지게 싸온 게살 샌드위치를 먹었다. 치즈를 두장 넣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볼때기를 상장 삼아 기념셀카도 찍어본다.


올라왔으니 이제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는 길은 쉬운 줄 알았는데 돌부리에 발목이 휘청거려 조심조심 발을 내디뎌야 했다. 오를 때보다 훨씬 집중력과 정신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다 길을 잃는다. 

눈앞에 덜컥 찾아온 위기에 눈물이 찔끔한다. 외진 산이라 전화도 통하지 않는다. 진짜 겁이 덜컥 난다. 이 길이 맞는지, 저 길이 맞는지 아까 나에게 말을 건 낯선 이도 없다. 그 순간은 오롯이 나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엄중히 오감을 집중한다. 한참 내 선택에 의지해 걷다보니 저 멀리 진짜 길이 보인다.


휴 살았다.


문수산은 북한과 가까워 날이 맑으면 그쪽이 다 보인다.






겁이라는 감각이 나를 뒤집어 무슨 정신으로 다녀왔는지 모를 첫 등산. 자랑할 곳도 없으면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성취감이 차오른다. 인생에서 해야 하는 몇 가지 큰 일중 한 가지를 이룩한 기분. 앞서있는 누군가를 따라가지 않아도 되고, 탈락할 걱정도 없다. 누군가의 페이스에 자신을 비교하지 않아도 괜찮다. 내 발걸음에 집중하고 갈림길에서는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 져야 한다. 누군가와 대화하지 않아도 내 숨소리와 오붓하게 더 깊은 대화를 하며 걸을 수 있다. 그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나는 시작하는 추진력은 좋지만 진득한 면이 부족하다. 무언가를 깊게 파보지도 못했다. 일에서도 관계에서도 삶에서도 그랬다. 완벽하지 않은 상태를 견디지 못해 도망가기 급급했다. 그런데 매웠던 첫 등산이 끝난 후, 나는 매주 꼬박꼬박 산에 갔다. 지치고 힘들어도 그래도, 그래서 갔다. 아마 학창 시절 체육선생님들께서 이 소식을 듣게 된다면 큰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그렇다고 엄청난 등산 고수가 되었다거나, 울그락 불그락 근육 철인이 되었다거나, 등산계에 한 획을 그은 엄청난 신화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절대. 여전히 산에 오르면 얼굴이 빨개지고 숨이 차서 중간중간 쉴 때가 많으며, 걷다가 지치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여기를 오르고 있나 한탄하기도 한다. 몇 번을 왔던 길도 여전히 잃으며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산에 가지 말까 깊은 고뇌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정상에 오르면 매번 느끼는 차오르는 성취.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던 자연의 흐름을 느끼며 산을 사랑하게 되었다. 익어가는 도토리를 보며 계절의 변화를 체감하고 잎파랑이가 활발하게 생산되는 녹음 가득한 나뭇잎이 새붉게 변해가는 과정을 본다. 겅동겅동 뛰는 다람쥐와 청설모를 만나고 머리가 부서지는 건 아닐지 걱정되는 딱따구리를 만난다. 팔랑팔랑 나는 제비나비 그 위로 두둥실 떠오른 나비 구름, 어른이 되며 잊었던 그것들의 생김새와 그것들을 '벌레' '새' '나무' 하나로 묶지 않는 고유한 이름을 알아간다.


생명의 이름을 알아가며 내 몸이 가진 힘을 인지하게 되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몸은 부끄럽고 숨겨야 하는 대상이었다. 미디어 속 완벽한 몸과 평범한 내 몸을 비교해 평가절하하고 자학하며 비난한 시간이 길었다. 나에게 주어진 음식을 한정하고 몸을 더 작게, 연약하게 깍아내리는 것에 삶의 모든 것을 집중했던 시간이 있다. 그러느라 거기에 에너지를 쏟느라, 중요한 것들을 포기하고 놓치고 살았던 시간이 있다.


산을 오르면서 자연히 체력이 좋아지고, 늘어난 체력으로 또 다른 도전을 이어나가며 움직임, 힘이 주는 선순환을 알았다. 평평한 나의 평발이 바닥을 치고 언덕을 오르는 힘을 느끼는 것, 어린 시절부터 내내 콤플렉스였던 종아리 근육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 땀을 흘리는 것이 불쾌하고 찝찝한 것이 아니라 상쾌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힘들 수록 가만히 고립을 선택하기 보다 일단 일어났다. 숨지 않고 드러내는 용기. 이 모든 것은 산이 나에게 알려준 몸의 깨달음이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에 조숙한 어린아이는 일기장에는 적었다. 산에 오르막 내리막 길이 있듯이 인생에도 오르고 내리는 길이 있다는 것. 그것을 오르고 내리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것. 지금보다 조숙했던 어린아이의 깨달음을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지냈다.


이제야 비로소 자연에서 세상의 오르락 내리락을 느낀다. 새싹이 돋으면 열매가 맺으며, 꽃이 피어나고 나면 이파리에 붉은색이 피어난다. 밀물이 있으면 썰물이 있으며 힘을 들이는 시간이 있으면 쉬어도 가야 한다. 함박웃음이 가득한 시간도 있지만 조용한 침묵, 눈물의 시간을 유지하는 것도 필요하다. 자연에서 느끼는 명료한 자연과 계절의 대비를 느낀다. 내 인생의 오르막 내리막을 느낀다. 혼자 그리고 함께 오랜 시간 동안 오르고 내리는 순간을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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