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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귤 May 23. 2022

방탕한 해

북한산 운해 위에서

새해 큰 결심이 생겼다. ‘방탕하게 살기’다.  


대학교 시절에도 취업을 해도 집은 잠에서, 통금시간은 10시 었던 탓에 이제는 오후 9시면 자발적 귀소본능으로 음주가무를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이 됐다. 음주가 방탕하냐,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어쨌든 인간은 못해본 것을 아쉬워해서 그동안 마시고 즐기며 살지 못했다는 후회는 결국 계획된 방탕함을 초래했다. 나 이제 방탕하게 살겠다고 지인들한테 돌림 노래를 부르던 와중 확실한 일탈이 생각났다. 


바로 ‘일출 산행’이다.


요 며칠 주말마다 아침에 일어나면 등산화를 주섬주섬 신고 나가서 해가 지면 신에 흙을 잔뜩 묻히고 오는 딸을 못마땅히 보았던 엄마는 일출을 보러 산에 간다는 딸의 소식에 기함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방탕하기로 한 딸의 결심을 어머니는 막지 못한다.




새벽 3시 '누가 가장 등산에 미친자인가?' 에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친구들과 북한산 백운대를 향해 출발한다. 처음 마셔보는 배기가스 축 가라앉은 서울의 새벽 공기. 뻥 뚫린 명쾌한 고속도로가 신기하고 재미있다. 기-인 주홍 터널을 지나는데 잠이 오는 탓에 이 길이 광활한 우주 저너머로 넘어가는 궤도 같다. 두렵지만 약간은 규칙을 어긴 설레는 기분. 이게 바로 새벽 탈출인 건가? 히히..


새벽 3시 30분 북한산 국립공원 백운탐방지원센터에 도착했다. 개방 시간은 새벽 4시부터라 기다려야한다. 떨리는 마음으로 출발선에서 기다리는데 출국행 비행기 탑승구 앞에 줄 서있는 기분이다. 

새벽 4시 백운탐방지원센터가 열린다. 흔하디 흔한 미니약과를 오물거리던 입들은 전세계 단 하나 남은 한정판을 손에 넣기 위한 오픈런 발로 등산을 시작한다.


해가 뜨려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정상을 향해 걸음을 박찬다. 뛰듯 걷는데 새벽이 묻은 촉촉한 흙이 부드럽게 신발에 감기며 그 내음을 코 까지 전한다. 서울에서 가장 칠흑 같은 공간. 무뎌진 시각 위로 청각과 촉각이 또렷하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청아한 계곡과 똘망한 개구리 목소리 그 위로 뺨을 치는 차가운 공기는 달아오르는 얼굴과 마음을 식힌다.


3시간 뒤에 출근해야 하는 마음 급한 친구,  음주가무를 즐기다가 끌려온 친구, 그리고 첫 방탕함에 상기된 나는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머리에 붙인 헤드렌턴을 까닥거리며 달을 미러볼 삼아 서로의 흥분을 교감한다. 인간 반딧불이다. 한참을 오르니 더 이상 오를 길이 없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곧 떠오를 해를 보러 온 발 빠른 사람들의 헤드렌턴이 어둠 속에서 길게 빛 길을 만들고 있다. 반딧불이 축제다.


와 놀랍다.


오전 4시 30분. 북한산 백운대 정상, 어둠이 깊게 깔려 사람은 잘 안보이고 웅성거리는 소리만 가득한데 초연한 어둠 사이로 빛의 기미가 시작된다. 야릇한 여명이 주위를 밝히며 정상의 경관을 무대에 등장시킨다. 


오잉. 근데 내 발아래에 산이 없다.

구름이 있다!  구름이 풍성하다. 이대로 똑 떨어지면 구름 위에 '퐁' 올라갈 것 같다. 배스킨라빈스를 사면 들어있는 드라이아이스를 변기에 포옥 넣었을 때 보글보글 올라오던 그것과 같다.


이게 바로 운해구나.



아직 잠이 덜 깨 견고히 뭉치지 못한 연약한 구름은 솜사탕 기계 솜사탕처럼 하늘 위로 맥없이 흩날린다. 

이것들을 잘 뭉쳐 입에 넣으면, 별가루가 되어 혀에 닿는 사탕이 될 것만 같아.


새벽 4시 54분. 빛의 실마리가 주인공 등장을 예견하며 무대에 빈 공간을 만든다. 수줍지만 존재감 넘치는 오늘의 해가 둥근 모서리를 빼꼼히 내보인다. 

그리곤 곧 모든 걸 압도할 거대한 침묵이 깔리며 오늘이 시작된다.



순샘의 검정이 밀려나고 그 자리에 빛이 채워지는 놀라움. 

빛은 흰색이라고 생각했는데 빨강과 노랑과 초록과 파랑과 남색과 보라가 두 눈 위에 흩뿌려진다. 

그리곤 자석의 철가루마냥 그 빛들이 태양에 모여들어 하양이 된다.


아, 벅차오르는 감동을 표햔할 수 있는 적당한 단어가 있을까. 찍을 수 없는 사진이 있듯, 담을 수 없는 단어도 반드시 존재한다. 여기 모인 많은 사람들이 일출을 보러 온 마음, 그 떠오름을 보며 느끼는 감정은 제각각 다르겠지만 나는 이 해를 방탕한 해라고 부르기로 한다. 엄마에게 방탕한 해를 카카오톡으로 공유한다. 일찍 깨어있던 것인지 잠을 못 이룬 것인지, 엄마의 1은 금방 사라진다. 그리고 떠오른 오늘을 함께 축하한다.


"규리야"


뒤를 돌아보니 쑥스러움이 많은 미래의 남자 친구가 촉촉이 감명 젖어있는 나에게 다가온다. 그리곤 가방에서 자신감 있게 비장의 무기를 꺼낸다. 배낭 안에는 30cm가 넘어 보이는 텀블러가 있었고 또 그 안에는 반쯤 얼린 “딸기맛" 짜요짜요가 5개 들어있다.



오늘의 해와 뭉게뭉게 드라이아이스 운해 위에 내가 있다. 그 정경을 바라보는 손에는 적당히 얼었다가 다시금 말랑해진 딸기  짜요짜요가 있다. 참지 못하고 곧장 오른쪽 옆부분을 이빨로 뜯어낸다.  안의 달큼한 요구르트, 아주 작은 젤리를 메마른 혀로 탐닉한다. 그런 생각이 든다. 나의 방탕이 다소 건설적으로 흘러간다는 생각.


그리곤 변태처럼 다시 오후의 관악산을 향해 출발한다.


방탕한 기념사진도 찍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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