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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귤 Sep 14. 2022

산빵

북한산 숨은벽에서

긴 연휴의 끝. 마지막 날까지 필사적으로 놀기 위해 북한산으로 달려간다.

사람 생각하는 게 다 비슷한지 아스팔트 위에는 꽤 많은 차가 목적지를 향해 속도를 내고 있는데, 잠깐! 톨 게이트 5km 전. 갑자기 뉴런이 시냅스를 반짝이며 속보를 전한다.


긴급 : 빵을 먹지 않은지 2주째.


에너지로 쓸 밀가루가 더 이상 몸에 남지 않았다는 것은 비상 상황이다. 급하게 U턴한다. 아주 좋아하는 빵집으로 경유지를 추가한다. 이른 아침이어서 빵이 많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는데 푸짐한 빵들이 진열대에서 환대한다.

'어서 와, 많이 그리웠지?'

오븐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얗게 피어오르는 표면의 열기. 확신이 든다. 요 빵들이 오늘 실패 없이 행복을 줄 것이다


흑갈색 앙금을 가득 품은 넙데데한 단팥빵. 이 색은 인간의 앙심과 다른 넉넉함이 들어있다. 

소보로로 켭켭이 표면을 가려도 그 속이 드러나는 완두 앙금빵. 그것은 인간의 숨겨지지 않는 본심과 다르다.

만든 이의 넉넉한 인심 덕에 투박진 빵은 집게로 집기 어려울 정도로 묵~직하다. 마음에 드는 빵을 고르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가장 좋아하는 빵을 구매하기 위해서다. 가장 맛있는 음식을 나중에 먹듯 가장 좋아하는 빵은 마지막에 골라야 제맛이다.


"어....... 혹시...... 맘모스빵은... 아직.... 안 나왔나요??"

"7분만..... 기다리시면 되는데.... 괜찮으세요?"

"넵!"


오늘 아주 운수가 아주 좋다. 맘모스가 나오는 기가 막힌 타이밍에 빵집에 왔기 때문이다. 덕분에 솜씨 좋은 제빵사가 맘모스 만드는 귀한 광경을 볼 수 있다. 계산대 넘어 빼꼼히 그 고귀한 과정을 본다.


펄펄 끓는 오븐에서 나와 트레이 위에서 몸을 식히는 맘모스 빵. 표면 위 갈라진 소보로가 그의 노고를 증명한다. 차분히 열기를 식힌 빵. 하나씩 제빵사의 손바닥 위에 얹혀진다. 피자 도우처럼 전문가 손바닥에 올려진 맘모스 도우. 한쪽에는 단팥 앙금, 다른 쪽에는 차갑고 부드러운 우유 버터크림이 무심하지만 다정히 스윽 스윽 발린다. 마지막으로 봄철 벚꽃처럼, 겨울 첫눈처럼 탐스러운 밤과 호두 알갱이가 하늘에서 흐드러져 내려와 버터크림 속속에 박히고, 이 모든 것들은 일순간 제빵사의 노련한 손길로 인해 가차 없이 하나로 합체된다.


어린 시절 엄마의 검정 비닐봉지에 담겨있던 큼지막한 맘모스를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은 잊을 수 없다. 게다가 그 큰 빵은 엄청 맛있었다. 바삭한 소보로와 달콤한 앙금 부드러운 생크림, 삼박자가 입안에서 뒤섞여며 만드는 당분의 하모니. 그 풍족 감은 수십 년이 지나도 맘모스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좋아하는 음식은 직접 만들어서 먹어보는데, 맘모스는 그럴 수 없다. 맘모스를 만드는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품이 많이 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이 의식을 보니 맘모스는 확실히 저평가된 빵이라고 다시 한번 격하게 생각한다.


마스크가 가리지 못한 신나는 얼굴. 감출 수 없는 똥그래진 욕망 가득한 눈동자. 뜨거운 시선을 의식하였을까, 점원은 완성된 맘모스를 비장하게 들고 나와 매장 중앙에서 맘모스 컷팅식을 한다. 일종의 퍼포먼스 같다. 크고 하얀 도마 위에서 기다란 빵 칼로 동그란 행복 덩어리가 잘리는 완결의 시간. 어릴 적 재벌 드라마에서 보던 삼단 케이크를 자르는 것 같은 위엄. 그날 그 빵집의 첫 맘모스는 나에게 살포시 안긴다.





볕이 찬란한 초가을의 한 낮, 계절마다 찾는 북한산 숨은벽에는 웃음꽃이 깔깔 핀다. 가방이 축축해질 정도로 땀이 나지만 지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힘이 난다. 든든한 것이 가방에 들었기 때문이다. 내친김에 목표했던 것보다 더 올라가 보자고 용기를 내기도 한다.


북한산의 백운대, 인수봉, 문수봉, 용혈봉 그리고 한국 산에는 많은 봉우리가 있는데 솔직히 나는 산에 많이 다녀도 봉우리 이름에 익숙하지 않고, 심지어 잘 까먹는다. 하지만 숨은벽은 귀에 쏙 박히고 입에 착 붙어 처음 들었을 때부터 절대 잊지 않았다. 맘모스 빵도 그렇다. 크기와 맛이 주는 존재감도 분명하지만 빙하기에 살았던 거대한 코끼리, 매머드를 상징하기도 해서 들으면 뇌리에 박히는 이름이다. 어떤 것을 뜻하는 이름이 그것을 더 사랑하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제 나는 빵집에서 제일 비싼 맘모스를 살 수 있을 만큼 돈을 벌기 때문에 크리스마스나 생일이 아니어도 맘모스를 살 수 있다. 그래서 산에도 사가지고 올 수 있다. 하지만 어른도 참을 수 없는 것이 있지. 정상 가서 먹으려 했는데 당이 조금 떨어지자마자 아무 데나 털썩 앉아 가방을 뒤적거려 허겁지겁 깊은 곳에 간직한 보물 보따리를 꺼낸다. 


한 손으로 능숙하게 맘모스를 잡아 야무지게 베어 먹는다. 맘모스는 가위나 칼로 잘라먹는 게 아니다. 입술부터 식도까지 가득 묻은 행복감. 한가득 들어온 차가운 크림과 아직도 따뜻한 밀가루 덩어리. 탄수화물과 당과 지방의 아름다운 조합이 햇볕에 버무려져 동공을 파고든다. 온 감각이 되살아나는 충격. 어린 시절 처음 본 맘모스의 충격과 맞먹는다. 좋은 풍경을 바라보며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이렇게 세상에 살만한데 왜 엄한 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나 지난날의 고뇌가 유약하게 느껴진다.


숨은벽 고양이처럼 나른해지는 오후의 등산




산에 가면 반드시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들고 간다. 산에서 등산객들이 챙겨 온 음식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김밥, 햄버거, 전투식량, 과일, 초콜릿, 젤리, 약과, 꿀호떡과 같이 전형적으로 만날 수 있는 음식부터 여름에는 얼린 짜요짜요, 황도, 콩국물 겨울에는 단팥죽, 호빵, 순댓국까지 제철 재료, 계절 메뉴도 다양하다. 그렇기에 매번 같은 산을 가도 어떤 것을 먹을지 궁리하는 행복은 다채롭다. 눈부신 성취와 함께하는 정상 음식, 그중에서도 빵은 세상 어떤 음식과 비교할 수 없는 맛이다. 요즘 술과 음식, 음식과 장소를 페어링 하는 것이 유행인데, 나에게 빵은 산과 완벽한 찰떡 페어링이라 할 수 있다.


산에 가는 것이 아직 낯설고 두려운 사람이라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들고 산으로 가보자. 그리고 정상에서, 정상이 아니더라도 그 음식을 산에서 먹어보자. 산에서 우리는 방해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업무, 어깨를 움츠리게 하는 책임, 목표 그다음에 이뤄야 할 또 다른 목표. 그런 것들은 오롯한 개인의 고유한 생각, 삶의 감각, 빛나는 생명력을 느끼는 것을 방해한다. 방해꾼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산에서 꽃과 나무와 나비의 숨소리, 조건 없이 나를 받아주는 땅에서 산만해진 미각을 오롯이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자. 그것이 등산의 맛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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