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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귤 May 12. 2022

등산의 맛

관악산 사당능선에서

초반에는 무조건 치고 올라가야 한다. 저혈압 클럽 멤버는 일찍 심박수를 올려놓지 않으면 그날 내내 심장이 무겁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헐떡이는 숨이 그만 멈추라고 애원하는데 오른쪽 귓구멍에 꽂은 에어팟 등을 꾹 눌러 노이즈 캔슬링 모드를 설정한다.


"신나는 노래를 틀어 귀에 들어오는 박자와 심장 박자를 맞출 거야."


숨이 더 이상 안 되겠는지 얼굴에 불을 내기 시작한다. 가기 싫다는 정신과 방화된 얼굴 그리고 태연한 다리가 삼단 분리되어 언덕을 오른다.


90분쯤 걸었을까, 무겁던 등산화가 순간 버디버디 신발처럼 가뿐해짐을 느낀다. 보통 빈속에 출발하기 때문에 어제저녁 이후 먹은 것이 없는데 글리코겐마저 다 사라졌을 자리에 아드레날린과 엔도르핀이 기분 좋은 포만감을 제공한다. 그러면 두 팔이 살랑살랑. 춤을 추는 것처럼 언덕을 오르게 된다. 나는 지독한 몸치인데 이게 춤이라면 나도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때부터 등산은 내가 된다. 그러나 아무리 더 빨리 걷고 싶어도 내가 자연을 이기려 하면 몸이 다친다는 것을 알기에 왈츠를 추듯, 강강 약약 속도를 제어한다.  


경사면에 매달린 몸통만 한 돌을 오른손에 움켜쥐고 왼 발을 디딤 삼아 정수리 위 미지의 세계로 오른다. 아스팔트 위만 걷다가 산길을 처음 접할 적에는 눈앞에 흙과 돌만 가득해서 어느 쪽이 길인지, 이 돌을 밟는 것이 맞는지, 어느 것을 움켜잡고 올라가는 것이 맞는지 헷갈리고 어려울 적이 많았다. 하지만 산길은 정답이 없다. 지나간 이들이 남긴 발자국 길인지 아니면 바람이 만든 길인지 모를 길을 걸으며 나는 답을 찾기보다는 해답을 구하는 과정을 익혔다.


‘끄응 차’ 기를 모아 올라가면 교복을 입고 강당에 모여 친구들과 목청껏 노래 불렀던 그 이름 ‘관악산'에 있음을 실감한다. "이래서 ‘악’ 산이구나" 다투듯 성취를 나누는 고등학생들이 터프하게 손을 툭툭 거리며 제 갈길 간다. 나는 그 시절 산에 갈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라는 기특하고 부러운 생각에 잠길 즈음 배에서 ‘고로로‘ 소리가 난다. 이쯤 되면 호르몬도 허기를 이기지 못하는데 고심 끝에 함께 걸어온 무언의 동료들을 나는 먼저 보내기로 결정한다. 그리고는 경치 좋은 곳을 지나치지 않고 풀썩 주저앉는다.


오늘 가방이 특히나 무겁다 했더니 뭐가 많다.


1. 뚱뚱한 참치김밥. 단면의 배색이 참 예쁘다. 뽀얀 마요네즈를 듬뿍 넣어 섞은 부드러운 아이보리색 참치. 여기에 노란 단무지, 주홍 당근, 갈색 우엉, 연노랑의 수줍지만 존재감 넘치는 계란지단, 뽀얀 흰쌀밥. 


2. 그 옆의 참치김밥보다 더 뚱뚱한 샐러드 김밥. 연분홍빛 크래미에 연초록빛 브로콜리와 양배추를 총총 썰어, 코끝을 찡하게 만드는 고추냉이 마요로 쓱쓱 비볐다. 이 모든 것들을 김은 살뜰히 말아버렸다. 한치의 터질 틈은 주지 않고. 역시 검은색은 완벽하다. 만든 이의 정성에 감격한다.



3. 앞니로 콱 깨물면 흰자가 기분 좋게 치아에 저항하는 쫀득한 오리알 두 개.

4. 그리고 육즙 가득 머금은 소시지.

5. 마지막으로 내가 정말 사랑하다 못해 미치도록 애정하는 '장블랑제리’의 ‘단팥빵'이 있다. 새벽 공기가 비닐 속 수증기로 남은 동그란 빵. 부드러운 얇은 외피 안에는 호두 덕에 입체감이 살아있는 팥 앙금이 알차게 들어있다. 이 소중한 빵은 입을 벌릴 수 있는 만큼 한가득 물어도 입술 가장자리를 까지게 하지 않을 것이며,미뢰 곳곳에 사랑스러운 달콤함을 잔뜩 뿌리겠지. 오늘 이 빵은 분명 밀가루 덩어리 이상의 역할을 할 것이다.

6. 여기에 물 세병 7. 가볍게 씹을 수 있는 견과류, 8. 작은 초콜릿 간식

(번외) 한 권의 책.


"이거 혼자 다 먹을 수 있어?"


오늘도 허기와 조난의 염려가 가득했구나. 걱정으로 가장한 식탐을 반성한다. 이미 지나간 나만의 비밀 동료를 떠올리며 아쉬워하다, "다 먹자!" 용기를 내보다가 곧, 남으면 집 가서 또 먹자고 셀프 토닥한다. 걱정을 뒤로하고 은박지에 담긴 기대를 열어보니 김밥에서 나온 축축한 물기가 땀에 젖은 손에 묻으며 기분 좋은 식사 시작을 알린다. 만든 이의 정성을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 먹자!


"음~! 맛있어!" 아침에 김밥 기다리느라 한 시간이나 낭비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한 입에 다 넣기 힘든 김밥을 최선을 다해 입에 넣고 설레발에 혀가 다치지 않도록 한다. 꼭꼭, 우걱우걱. 신선하고 맛있는 재료를 씹으니 저 멀리 어딘가에 앉은 오색딱따구리가 ’딱딱‘ 멋들어진 박자를 더한다.


배도 부르고 정상도 보고, 촉촉한 아침 이슬이 지난 자리. 오후 햇살이 눈가를 나른하게 한다. 연예인 김종국 씨가 "먹는 것까지 운동"이라고 말했는데 나한테는 "낮잠 자는 것까지 등산"이다. 작은 비단벌레가 애기세줄나비가 다람쥐가 너구리가 고양이가 다른 이가 잠시 눕고 간 자리에 등을 대고 눈을 감는다. 날아다니는 건지 떠다니는 건지 모를 날파리가 코를 건드리고 젖은 등이 식어 몸이 으슬해지면 눈을 떠진다. 시계를 본다.  


"오늘 좋아하는 일 다 했는데 아직 12시야!"


맛있고 가벼운 하산 길. 정신과 표정과 신체의 삼단 분리에서 여전히 갈등하고 있는 다른 등산객이 지나간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집 향기가 나는 그에게 우리의 남은 오늘을 마음속으로 응원한다.


가끔은 까마귀가 제 소세질 탐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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