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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귤 Jun 04. 2022

산에서 쓴 편지

도봉산 의상능선에서

저는 오늘 산에 갔는데요. 저는 산이 참 좋아요. 좋은 이유 중 하나는 산은 세대를 넘어 즐거운 대화가 가능한 공간이라는 게 놀랍다는 거예요. “오늘 혼자 어디까지 가요? 용기 있다”, “천천히 가요~ 얼굴 빨갛네.” “젊은 사람들이 산에 와서 참 좋아! 하하” 짧지만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응원하는 과하지 않은 관심이 오가는 대화.


저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모두 돌아가셨는데요. 그들과 이런 대화를 나눴다면, 함께 산에 갔으면 참 좋았을 텐데 싶어, 서글픈 마음이 들 정도로. 산에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되는 것 같아요. 산 밖에서는 못 나눌 이야기를 산에서는 쉽게 나눌 수 있거든요. 


너무 많은 단어들이 세대를, 성별을, 인간을 단편적으로 규정하고 편협하게 만들잖아요. 물론 저도 불쑥 치고 들어오는 차별적 단어, 나를 납작하게 만들려는 것들에 노출되어 살아가고 있어요. 다만, 산에서는 그러지 않았거든요. 항상 상처받을까 날이 선채로 살다가 지친 마음으로 산을 찾았을 때 느낀 편안함. 산에는 어려움과 두려움 그게 없어요. 순수하게 대화를, 이야기라는 것을 나눌 수 있는 공간. 그래서 산을 참 좋아합니다.


또 오늘은 어떤 아저씨가 얼마나 행복하면 아내분과 하산하면서 신나게 노래를 하시는 거예요. 어쩌면 덩실덩실 춤도 추셨던 것 같아요. 어떤 가락인지 정확한 가사와 이름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음성과 발걸음에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보았어요.


저도 하산길이 지루할 때면 가만히 주저앉아서 가사가 없는 노래, 예를 들면 히사이시 조의 공중 산책, 인생의 회전목마 같은 것을 듣는데요. 오늘은 순수한 새소리, 초 여름 계곡 물소리,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절묘하게 멜로디와 섞이는 거예요. 노래를 할 수는 없었지만 아저씨만큼 행복하고 신났던 것 같아요.


- 누군가와 주고받은 이메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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