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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귤 May 18. 2022

회복

나흘간 80km를 걸으며

몸과 마음에 출처 모를 멍과 상처로 보이지 않는 피가 나는 일이 잦았다. 삐죽 튀어나온 실오라기는 그런 줄도 모르고 씩씩하게 앞만 보고 걷다, 큰 구멍이 나서야 일이 잘못됐단 사실을 깨닫는다. 상황이 돌이킬 수 없이 나빠졌을 때 나는 더 이상 활자를 읽을 수 없었고 문장을 내뱉을 수 없었으며, 들어오고 내쉬는 공기가 따가워 더 이상 숨 쉬지 않아도 되는 공간으로 깊게 숨고 싶었다.


하루를 촘촘하게 고민하던 펜과 다이어리는 더 이상 어떤 계획도 세울 수 없었다. 아무거나 먹고 아무렇게나 입었다. 자려고 누우면 눈은 감기는데 잘 수가 없어서 스팸 메일함 따위를 뒤지느라 잠을 자지 못했다. 그렇게 삼일째 되는 날, 죽으란 법은 없다고 나흘간 휴가가 주어졌다.


휴가 첫날, 자학의 행위들로 긴긴밤이 지내고 무기력이라는 이불속에서 무거운 눈을 겨우 뜬다. 부족한 수면 탓에 무기력 껍질을 덜 벗은 채로 소파에 털썩 널브러져 있는데 아침으로 미숫가루를 제조하던(그 속에는 미숫가루 외에도 다양한 건강 가루가 들어간다) 엄마가 말한다.


"무생물처럼 뭐 하고 있는 거니."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새벽 5시면 자연스레 눈이 떠진다. 생물이 되기 위해 일어나자마자 등산복을 입는다. 타협이 깨어나 현실과 극적인 악수하기 전에 산으로 간다. 입구에서 100m만 가더라도 일단 출발해보자. 주섬주섬 구겨진 외투를 주워 입고 나왔는데 따뜻한 봄햇살 낙차에 구겨진 옷이 펴지는 느낌이다. 


출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질적 복장으로 도착한 구파발역. 주말과 다르게 평일 북한산 탐방지원센터는 입구이자 출구여유가 가득하다. 국립공원 지킴이와 가벼운 목인사로 겁고 안전한 하루를 기약하며 산행을 시작한.


산을 오르는데 갑자기 몸의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진다. 그것이 삶의 무게 같아 갑자기 서러워 암릉을 오르다 깊게 참던 눈물이 엉엉 맺힌다. 평지에서 숨겨지기 급하던 감정이 한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버린 것이다. 이곳은 바로 아무도 모르게 울 수 있는 가장 좋은 공간이다. 한참을 시원하게 울다 보니 부드러운 바람, 순수한 새소리가 나를 달래주는 것만 같다. 마음을 추슬러본다. 다시 묵묵히 가보자, 어차피 되돌아갈 길은 없으니까.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구름같이 살고 싶은데 그게  쉽지 않다며 입에서 작은 구름을 뱉어낸다.




나흘간 '좋아하는 ' '해야 하는 ' 집중했다. 아침에는 좋아하는 것을 하고 오후에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했다. 좋아하는 것은 '등산'이었고 해야 하는 일은 '생각에서 멈춘 어떤 '이었다. 그중 하나는 글쓰기다. 산을 좋아하는 나는  감사한 존재에 내가 무슨 자취를 남길  있을지 궁리가 가득했다. 떠오르는 생각은 많았고 시간은 흘렀는데, 이제야 겨우 하나를 해보았.


상황이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만 나흘간 80 km 걸었고, 4 산을 갔으며, 4편의 글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 활동량이 많은 탓에 밥을 많이  먹었고, 잠을 많이  잤다. 예전엔 감기지 않는 눈을 억지로 질끈 감으면 다른 사람들이 가진 꿈을 꾸느라 다시 눈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눈을 감으면 다시 뜨지 않았고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마지막 휴일, 산에 다녀와서 알람을 30분을 맞춰놓고 낮잠을 잤다. 정확히 29분에 닫힌 눈 사이로 자연스러운 빛이 들어왔다. 고요히 일어나 침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니 정오의 햇살이 따사롭게 비추는 이불 위에는 아무것도 바꾼 것이 없다. 그러나 왜인지 뭔가 바꿀 수 있는 힘이 도사리는 기운이, 아니면 적어도 내가 쥐고 있는 것은 놓치지 않을, 어쩌면 새로운 것을 손에 쥘 근거 없는 자신감마저 느껴졌다.


노트북을 켰고 나흘간 적은 4편의 글로 브런치에 지원했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나의 작은 산을 얻게 되었다.


그렇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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