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달리며, 깊이 우려내다: '나'라는 커피의 여정

마라닉 러닝 30일 챌린지 28일 차

by 박이운

오만과 편견

오랫동안 나는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믿지 않았다기 보단 믿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 말은 정말 누가 봐도 공정한 환경과 사회에서만 진리로 여겨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과거 매우 부정적이었던 난 이 말과 이 말에 대한 나의 부정적인 생각을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라는 글로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과거의 글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여기 자신의 땅에 씨를 뿌려 열매를 수확하고 판매해서 생계를 이어가는 두 농부가 있다. 그런데 만약 두 농부가 소유한 농지의 비옥한 정도가 다르고 갖추고 있는 경제적 여건이 다르다면 과연 이들은 똑같이 뿌린 대로 거둘 수 있을까? 출발선이 다른 이들은 같은 결승점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고, 그래서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은 절대 진리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이 말이 진리로 받아들여지려면 앞선 출발선에 서서 더 먼 결승점에 도달한 농부가 자신보다 뒤에서 출발해 여전히 결승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농부에게 해서는 안된다. 그건 폭력에 가깝다. 따라서 이 말은 자기 자신에게만 할 때 진리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과거의 난 내 생각이 맞다고 여겼다. 러닝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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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저의 오만과 편견을 여실히 보여주는 부끄러운 글을 공개합니다.>


달리면서 찾은 진실

그랬던 내가, 너무나도 미성숙했던 내가 러닝을 시작하고 꾸준히 달리자 이 말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처음엔 단순히 심리적인 변화만을 체감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 것이 아니라, 과거에 했던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달리기 시작한 지 28일 차가 된 오늘, 꾸준히 러닝을 하면서 단련되는 내 신체를 보며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떠올리게 됐다.


해가 뜨기도 전, 도시가 아직 침묵에 잠겨 있을 때 나는 홀로 달린다. 숨소리와 발걸음 소리만이 새벽 고요를 깨뜨리는 그 시간, 나는 나 자신과 마주한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처음엔 5분도 버거웠던 달리기가 어느덧 25분의 여정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내 몸은 단련되어 갔고, 더불어 내 마음도 단단해졌다.


커피의 섬세함을 닮은 '나'

작년 11월, 바리스타 1급 자격증(이론 & 필기)을 공부하고 취득했는데, 커피콩 한 알을 얻기 위해 얼마나 까다로운 조건과 관리가 필요한 지 처음 알게 되었다. 그걸 알고 나서야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나도 커피 같은 존재였던 건 아닐까?"


좋은 커피는 대부분 아라비카 품종이다. 병충해에도 약하고 관리가 까다롭지만, 조건만 맞아주면 섬세하고 깊은 향을 낸다. 그리고 이 커피는 반드시 해발 1,000m 이상의 고도에서 자란다. 기온 차가 커서 열매가 천천히, 조심스럽게 익어가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토양도 중요하다. 배수가 잘되고, 영양이 풍부한 화산 토양에서 물에 잠기지 않고,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또 하나, 햇빛이 강하다고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었다. 너무 뜨거우면 타버리고, 그늘 없이 방치되면 병이 든다. 적절한 햇빛과 손길의 조절, 그리고 가지치기와 같은 관리가 필수적이다. 커피 열매가 열린 후 재배하고 씻고 말리는 과정과 골라내고 로스팅하는 과정의 길고 복잡한 과정들 역시 매우 까다롭다 할 수 있다. 한 알의 씨앗이 풍부한 아로마를 가진 커피 한 모금으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인내와 고통의 연속인 우리네 삶과 닮아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였구나. 내가 '나'를 아무 데나 뿌리고 남들 하듯 관리하면 잘 자라고 열매를 맺을 것으로만 알았던 그땐 '나'라는 커피가 자라기엔 너무 척박한 땅에 심었던 것을 몰랐고, 다른 사람들과 같을 수 없는 '나'라는 존재의 성장에 필요한 섬세한 관리가 필요한 것 또한 몰랐던 것이구나.


러닝을 시작하고 나서야 알게 됐다. 나도 커피처럼 나에게 맞는 고도, 토양, 햇빛과 그늘을 찾아야만 했던 존재였다. 새벽이라는 고도, 땀과 숨이 섞인 토양, 조용한 호흡과 묵직한 발걸음이라는 햇빛과 그늘. 그리고 러닝을 하며 좀 더 섬세한 손길로 단련되는 마음 근력. 러닝이라는 새로운 땅에 '나'라는 씨앗을 뿌리자, 그제야 비로소 조용히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아직은 풍부한 아로마를 풍기는 커피로 완성되기까지 많은 여정이 남아있지만, 진하고 고소한 아로마를 뽐내는 '커피'가 되어가는 과정 중에 있다는 확신을 품게 되었다.


조금씩 우러나는 나만의 아로마

난 이제 막 러닝이라는 비옥한 토양에 나라는 커피를 심었다. 적절한 고도, 일조량, 강수량이 있는 곳에 말이다. 그리고 나라는 커피에 최적화된 섬세한 손길로 가지치기를 하듯 나 자신을 관리해나가고 있다. 뿌리기만 해서 거둘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돌봄과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새벽 공기를 가르며 달릴 때마다 나는 조금씩 변화한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러나 분명히 향기로운 무언가로 자라나는 중이다. 가끔은 그 변화가 더디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커피가 천천히 익어가는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서두르지 않고, 나만의 시간에 맞춰 자라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이제는 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이 단순히 농사의 법칙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토양과 환경을 찾아 정성으로 가꾸어 나갈 때 비로소 진실이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이해하고 인내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매일 아침, 새벽의 고요 속에서 달리며 나는 내 안의 깊은 향기를 조금씩 발견해 간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라는 커피의 향을 우려내는 중이다.


그리고 그 향이 나만의 만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누군가에게 따뜻한 위로로 닿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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