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에 짐을 풀고는 앞으로 지내게 될 방을 둘러봤다. 침대 매트리스만 조금 오래되었을 뿐 책상과 수납장 그리고 옷장은 크게 상한 곳도 없이 깔끔했다. 침대에 걸터앉아 방을 더 찬찬히 둘러보니 청소도구, 화장지, 식기류 등등 필요한 물품이 하나둘 떠올랐다.
아, 전기밥솥!
당장 밥을 해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자 뒤이어 전기밥솥이 사야 할 목록의 상위에 올라왔다. 자취를 해봤지만 밥솥을 직접 사 보는 건 또 처음. 어디서 사야 하는지도 밥솥을 일본어로 뭐라 하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근처 상가로 향했다. 터벅터벅.
전철역 쪽으로 가보니 중형 쇼핑 상가가 있었고 그 안에는 전자제품을 취급하는 곳이 있어서 어렵지 않게 밥솥을 찾을 수 있었다. 대충 가격대를 보고 적당한 걸로 고른 후 상자째 들고서 기숙사까지 걸어갔다.
4월의 일본은 바람이 무척이나 거셌고 날도 쌀쌀했다. 기숙사로 오는 내내 밥솥 상자를 안고 오느라 내 긴 생머리가 바람에 휘날려도 속수무책이었다. 그 추운 날씨에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나부끼고 밥통을 안고 한껏 웅크린 채 걸어오던 내 모습이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꽤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안쓰럽다거나 하는 그런 감정이라기보다는 그저 그때 바람이 참 많이 불었었지 하며.(나 T야?)
그 밥솥으로 유학 내내 밥을 해 먹었다. 흰밥뿐만이 아니라 건강을 생각해서였는지 그저 맛있어서였는지 여러 잡곡도 섞어서 밥을 해보기도 하고 반찬도 만들어 먹고 그때까지만 해도 지금과는 달리(?) 요리하기를 즐겼었다. 예쁘게 보기 좋게 그릇에 담고는 혼자서도 잘해 먹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요리가…
그때의 그 소녀 감성은 어디로...
그래도 가끔은 나의 로망이었던 헬싱키의 <카모메 식당> 주인 사치에를 떠올리며 요리를 해 봅니다. ㅎ 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