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 Jung Jul 07. 2023

왜 갑자기 달리는 거야?

그러게 말이야 나도 잘 몰라

주법도 몰라. 전문지식은 아무것도 없어. 제대로 못 뛰고 있을지도 몰라.
근데 안 하던 거 하고 싶어서 나왔어. 안 하던 거 도전하는 내가 좋아.
달리다가 차 소리도 안 나고 새소리만 들려서 가만히 멈추기도 했어.
기록도 신경 안 쓰고 그냥 안 하던 걸 도전하는 내가 좋아. (6월 30일)


달리다가 너무 좋아서 음성으로 메모장에 후다닥 남긴 기록이다.

그냥 무지막지하게 좋았나 보다.


최대한 가능하면 뛰지 않고 걷던 삶인데 언제부터 그랬냐는 듯 갑작스럽게 매일 달리기를 생각하고 있다. 누군가가 마치 소개팅한 이성과 한 달 만에 결혼을 약속한 사람 같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옷과 신발부터 사고 냅다 뛴 지 일주일이 갓 지났고, 이는 분명 원래의 나는 하지 않던 패턴의 행동이다. 원래는 사전에 정보 탐색만 엄청하다가 지쳐서 그새 흥미는 떨어지고 역시 내 이럴 줄 알았어라며 늘 그렇듯 고요히 사는 유형.

하여 달리기를 바라보는 내 시선의 변화 그리고 내 생각과 몸의 변화들을 기록하려 한다.




조계사 주변의 호텔에 머무는 일주일 중 하루, 알람 없이 눈이 떠졌다.

6:17 am. 다섯 시간밖에 안 잤는데 부담스럽게 말똥말똥하다.

커튼을 걷어보니 비가 안 온다. (아 왜 안 오는 거야; 핑곗거리 -1)

다시 잘까 말까, 분명 낮에 피곤하겠지. (핑곗거리 +5)

아 씻기 귀찮은데, 뛰고 나면 또 샤워도 해야겠지. (핑곗거리 +10!!)


여러 번민이 짧은 시간 버라이어티하게 스치다가도

'오늘 아니면 내가 언제 또 서울 한복판을 뛰어보겠어' (핑곗거리 0, RESET!)

'그래 오늘은 경복궁이다!' 하고 눈곱만 떼고 10분 만에 나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중년의 아저씨가 인사를 건네신다.

"군모닝!" 군.. 모닝? 이건 필시!! 한국인의 엑센트다!! 으.. 괜히 한국인끼리 영어인사하는 거 아냐;

그래도 1층에서 헤어지며 먼저 "Have a good day!" 했더니 한국인의 것이 아닌 강한 Rrr 발음으로 "Have a great day!" 라신다.

휴 다행이다 (뭐가 다행이지?ㅋㅋ 잡생각이 많은 자다.)


경복궁 오른쪽 코너에서 시작한 달리기.

이틀 전 뛸 땐 출근길 시간과 맞물려 인파가 좀 신경 쓰였는데 일찍 나오니 사람들도 덜하다. 근데 우리나라 경복궁... 참 크데... 역시 이 정도는 커야 왕이 사는 곳이구나 싶게 첫 번째 코너를 돌지도 않았는데 힘들더라. '오늘은 그냥 걸을까?' 하는 마음이 쑥 올라오기도 한다. 조금만 더 참고 뛰어보자 했다. 하지만 분명히 다른 사람눈에는 뛰는 거야, 걷는 거야? 싶었을 속도였을 거다.


쭉 뛰어 올라가다 보니 늘 멀리서 산속에 파묻혀 보이기만 하던 파란 지붕의 청와대가 나타났다. '오 달리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는 이런 근사한 문장이 아침의 나에게 적용 가능하다니! 기분이 좋다. 어느 순간 차도 사람도 없이 새소리만 나는 고요했던 지점도 만났다. 어릴 때 가끔 밤에 북한산 자락에서 들리곤 했는데 도시 한가운데서 뻐꾸기 소리를 듣다니. 나오지 않았다면 들을 수 없었던 다양한 새소리 들을 영상으로도 휴대폰에도 담았다. 그리고 그때 오늘의 글 초반에 쓴 메모를 남긴 것이다. 정말 좋았던 순간.


여기다! 뻐꾸기 외 다양한 새소리에 황홀했던 스팟!

다른 러너들도 많이 스쳤다. 심지어 속력들이 좋아서 나는 한 바퀴 돌 동안 두 번 본 사람들도 있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느려도 괜찮아. 오늘은 정말 진짜 진짜 천천히 뛰어보자고 마음먹었으니까.' 분명 첫날 20분을 뛰었다고 했는데 다른 날 혼자 뛰다 힘들어서 시계를 보니 10분도 지나지 않았기에 분명 내가 실력에 비해 오버한 듯싶어 오늘은 더 의식하며 천천히 뛰기로 했다.


지면의 종류에 따라 발에 전해지는 느낌이 다름이 느껴졌고 공사 중이라 광화문 앞 대로변에 쳐진 가림막 때문에 차들이 안 보일 땐 갑갑하다기 보단 뭔가 늘 알던 이 공간이 아닌 느낌, 그리고 넓은 도시에 홀로 남겨진 느낌이 났다. 뭔가 혼자 투명 망토를 걸친 채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는 재밌고 우쭐한(?) 기분도 느꼈는데 나중에 현장에서 찍은 사진을 보니 딱히 그런 요새 같은 장소도 아니길래 ‘오 그때의 그 느낌이 내게 참 좋았나보군’ 싶었다. 혼자 아주 취해서 뛰었나 보다. 소개팅 상대에게 제대로 반한거지.


참 좋아하는 맛집, 메밀꽃 필 무집도 오랜만에 만나고


궁을 한 바퀴 돌고 알았다. 우리나라 경복궁의 둘레는 3km구나. 크크

호텔로 다시 올라가는 길에 탄 엘리베이터에서는 누가 봐도 외국인처럼 생긴 남자를 만났다.


"구떼!" 란다.

읭? 하며 일단 대충 목례를 하고 내리긴 했는데 2초 후 알았다.

아! "Good day!"


과연 그러했던 하루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뛰었을 뿐인데 이렇게 기특할 일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