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 <불안> 독후 에세이
우리는 갓난아이 시절부터 불안을 학습한다.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갓난아이는 자신에게 충분한 식사와 안정을 공급해주는 어머니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목청껏 운다. 이는 아무것도 학습하지 못한 아이의 유일한 생존전략이기도 하다. 이렇게 무조건적 사랑을 '본의 아니게' 학습한 우리기에 늘 불안 속에서 삶을 배워나가고 있다. 이에 알랭 드 보통은 저서 <불안>을 통해 말한다.
우리는 무력하고 벌거벗은 상태에서 부모의 돌봄을 받으면서 처음으로 사랑을 경험했다. 아기는 그냥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사랑을 받고 돌봄을 받는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애정은 성취와 관련을 맺기 시작한다. 예의를 지킨다든가, 학교나 다른 곳에서 좋은 성과를 거둔다든가, 계급이나 명성을 얻는 일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불안은 어디에서 우리를 찾아오는가. 불청객처럼 삶의 여러 길목에서 불안은 우리를 침투한다. 유치원에서부터 친한 친구와 친하지 않은 친구를 나누기 시작하고 '친밀감을 나눈 무리'에서 배척당하면 식음을 전폐하기도 한다. 이뿐인가. 학교에 입학하고 본격적인 사회의 무리 생활이 시작된 후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이렇게 무조건적인 애정을 받기에 '합법'한 유아기를 지나고 나면 자연스럽게 애정은 소속한 사회 안에서의 성취와 관련을 맺기 시작한다.
즉, 우리를 인정해주는 온갖 말들과 직접적인 애정표현, 좋은 성적, 눈으로 보이는 성과 등을 무기로 본격적인 불안과의 사투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재능과 성취란 것은 개인의 역량만으로는 통제가 불가능하기에 (운과 때가 따라줘야 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자주 실패한다. 그리고 그 패배의 대가로 크나큰 상실과 불안을 거듭해서 맛보곤 한다.
애정과 존경을 원해서 열의를 다해 열심히 한 성과들이 다른 경쟁자에 의해 그대로 묵인되었을 때의 좌절감, 포부 있게 시작했지만 결국은 이루지 못한 나의 계획에 대한 주변의 시선들, 마음을 나눈 연인의 매몰찬 이별통보 등 삶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방식의 불안을 맞닥뜨린다.
에리히 프롬은 저서 <사랑의 기술>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무조건적 사랑을 갈망하는지에 대해 역설한다.
무조건적 사랑은 어린아이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가장 절실한 갈망 가운데 하나다. 한편 어떤 장점 때문에, 다시 말하면 사랑받을 만해서 사랑받는 경우, 언제나 의심이 남는다. 내가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언제나 남아 있다. 언제나 사랑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살기 참 팍팍하다"
에리히 프롬 역시 어떤 관심이나 인정, 사랑에 특정한 "이유"가 존재한다면, 그 이유에 대한 두려움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된다고 했다. 그것이 사라졌을 때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할 것 같은 일종의 강박이다. 이를 통해 왜 우리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정당한 노동을 하며 살아가면서도 늘 불안한지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
로또에 당첨된 다음날 아침, 자신을 괴롭히던 직장 상사 책상 위에 (큰) 용변을 보고 고소당한 직원의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이와 같은 피고용자로서의 노동의 중압감과 스트레스는 어디에서 찾아오는가. 알랭 드 보통 역시 우리의 원천적 불안의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이 고용불안이라고 꼽았다. 그리고 이 고용불안은 놀랍게도 노동현장에서 얻을 수 있는 인정과 애정의 질에 달려 있다고 역설한다.
사회 구성원들은 대부분 사회에 나가 일을 한다. 노동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며 정당한 대가인 임금을 지불받는다. '늘 가슴속에 사표를 지니고' 살아가긴 하지만, 끊임없이 어떤 무리에 자발적으로 고용되어 일한다. 그리고 이렇게 노동을 제공하면서 피고용자는 자연스럽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들 자체에 대한 인정과 칭찬을 갈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직장이라는 공간은 무조건적인 인정을 베풀지 않으며 오히려 성과와 조직에 기여한 사람에게만 ‘일시적’으로 사랑을 허용해준다는 서글픈 사실과 마주하게 되고 만다.
"내가 나이기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성과를 내기 때문에 인정받는 것뿐이다."
이는 반대로 성과를 내지 못하면 결국 사랑받지도, 인정받지도 못한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된다. 따라서 끊임없이 주변과 조직의 인정을 갈망하며 이를 이루지 못하는 데에 대해 자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은 모든 철학과 저서를 관통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을 주창한 프리드리히 니체 역시 이 인정 욕구에 대단한 갈망을 느꼈었다. 니체가 자신의 '놀라운' 통찰을 열정적으로 옮겨 <우상들의 황혼>, <이 사람을 보라> 등의 저서를 발표했으나 세상은 냉담했다. 독자도 출판사도 그를 외면했다. 그의 책은 1년에 겨우 60권 남짓 팔려 자비로 책을 찍어야 했을 정도였다. 결국 고독한 천재는 자신의 천재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어떤 때는 자기 책을 들여다보며 몇 시간을 울기도 했다.
그렇다면 직장에 성공을 거둔 사람, 즉 주변의 인정을 받은 사람은 그 불안이 충족되는 것일까. 알랭 드 보통의 대답은 "아니다"이다. 이는 부도, 인정도, 권력도, 그 모든 것은 지금의 이 넓은 세상에선 전부 상대적인 가치이기 때문이다. 지위에 대한 요구는 점차 자신이 만나는 무리의 기준으로 높여져 나가아 갈 것이고 결국 그로 인해 사람은 끊임없는 불안을 과제로 얻을 수밖에 없다고 저자는 단언한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이다. 모든 불안의 출발도 여기서 비롯된다. 역설적이게도 무언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사람은 고통스럽다. 불안의 고통은 사랑의 부재, 즉 '분리'로 인함인데 사랑하는 대상의 부재는 격렬한 불안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연인, 가족, 친구, 반려동물 등 내가 무조건적 사랑을 베풀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그 대상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막연한 공포감은 늘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특히 나 아닌 다른 이와 연결된 '관계'는 일방적인 노력만으로는 지속이 불가능하기에 관계의 단절은 늘 불가항력적으로 일어나곤 한다. 그 결과, 우리는 이별을 통해 부재를 배운다. 이 부재는 “우리의 반응 능력 이상으로 세계가 우리를 침범하는 것"이기 때문에 늘 우리를 패배감에 젖게 만든다.
외부에서 얻는 지위, 인정, 성취, 애정으로 나의 공허함과 불안을 메꾸는 건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배워가는 것은 결국 “인생이라는 것이 하나의 불안에서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불안을 극복하거나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노력은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 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불안은 "더 나아지고자 늘 발전해왔던" 인류의 숭고한 과제였으며, 그 영광의 상처가 우리 마음에 파편으로 남아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불안을 극복하시고 평정심을 찾으세요!"류의 메시지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인류의 고달픈 숙제와 같으니 불안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녹록지 않은 삶의 여정 곳곳에서 우리는 자기 비하, 질투심, 상실감, 공허감 등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를 위안하는 방법들을 서툴게나마 배워간다.
2018년에 개봉한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는 난파된 배를 탄 한 소년의 생존기를 그리고 있다. 소년 파이와 그리고 그 배를 탄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주인공이다.
당연히 맹수 호랑이는 굶주렸기에 때마다 소년 파이를 위협한다.(애초에 태우려고 하지 않았었다.) 생과 사를 목전에 둔 파이는 잠이 올 턱이 없다. 눈이 감길 때면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뜨고 노를 젓고 경계한다. 쉴 틈이 없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노인이 된 파이는 난파선 생존자로서 자조적인 고백을 한다.
" 전 리처드 파커가 아니었으면 죽었을 거예요."
배를 몰아본 적은커녕 조난당했을 때의 매뉴얼조차 알지 못했던 소년이 넓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살아남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이가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는 자신의 철저한 감시자였던 리처드 파커로 인함이었다. 이처럼 두려움이 희망이 되는 순간이 삶 속에서 찾아오곤 한다. 불안 역시 삶 속에서 중요한 기폭제 역할과 감시자 역할을 충분히 감행하고 있다고 볼 때, 우리는 불안을 느끼는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일러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막막함이나 불안은 결국 더 나은 것을 향해 가고 싶어 하는 자아의 메시지이다.
불안이 있기에 우리는 안주하지 않고 삶이라는 망망대해를 순항해 나아간다. 때론 역풍에도 부딪히고 닻도 뒤집히면서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럭저럭 버티며 살아간다.
더 나아가 사실 주변과 나를 둘러싼 세계가 내 생각보다 '거대하지 않다는 것', (이는 저자가 일컫길, 기독교적 세계관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내가 어디에서 누구에게 인정을 받을 것인가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있다는 점을 늘 마음으로 인식만 한다면 불안이라는 적에게 매번 패배해 상념에 젖지만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