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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색 Mar 08. 2022

[영화 리뷰] 8월의 크리스마스ㅣ추억조차 되지 못했다

남겨진 사랑이 아파하지 않게

<8월의 크리스마스> 감독: 허진호ㅣ배우: 한석규, 심은하

8월의 크리스마스: 영화 포스터

매서운 바람에 급하게 목도리를 사서 둘러야 했던 추운 저녁이었다. 허진호 감독의 데뷔작이면서 여전히 대표작인 <8월의 크리스마스>를 만난 건.

1998년 1월에 개봉했던 <8월의 크리스마스>는 여전히 많은 영화팬들에게 ‘다시 보고 싶은 명작’ 리스트에 올라 있는 영화다. 개봉 당시 인연이 닿지 않아 보지 못했고 이후 많은 사람들의 말과 글로 회자된 만큼 케이블방송 등에서 숱하게 방영됐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를 집중해서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뒤 잠시 멍하니 앉아 있어야 했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오래되고 빛바랜 이 영화를 ‘인생 최고의 멜로 영화’로 손꼽는지 알 수 있었다.


"막연히 사진사란 직업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을 했어요. 그러다 어느 시사 주간지에선가 고 김광석 씨의 영정 사진을 봤는데, 활짝 웃는 모습에서 어떤 충격 같은 걸 받았어요. 게다가 그렇게 젊은 모습이라는 게. 그래서 사진사가 자신의 영정 사진을 혼자 찍는다는 것을 먼저 설정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나갔죠. 죽어가는 사람의 일상은 뭘까,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의 일상은 어떤 느낌일까, 하는 것들을 생각해보고 싶었어요. 일부러 ‘절제’하고 감정을 억누르려고 의도했던 건 아닌데, 저는 그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어요.” 감독의 말이다.

죽음에 대한 주제를 담고도 이 영화처럼 눈물과 절규, 회환과 후회, 악다구니가 없는 영화가 드물다. 그래서 희한하고 신선했다. 영화의 시선은 정원(한석규)이 사진관 창문 넘어 세상과 다림(심은하)을 쳐다보듯 그렇게 일정 거리를 두고 시종일관 담담하다. 그것이 죽음을 앞둔 정원이 삶을 정리하듯, 일상의 소소한 장면들에 대해 카메라도 클로즈업하지 않고 바라본다. 정원의 병명이 뭐고 첫사랑과의 사연은 어떠했는지 등 자세한 사전 정보를 생략해버렸다. 특유의 롱테이크와 멀리서 바라보기는 중간에 지루함이 찾아올 정도로 관객에게 불친절하.


  차분하고 담담해서 더 눈물겨운 그의 일상


그럼에도 일상에 관한 섬세한 묘사와 절제미는 평론가들 뿐 아니라 관객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아버지에게 비디오 조작법을 가르쳐 주거나 글로 남기는 모습, 이불속에서 소리 죽여 흐느끼는 정원과 방 밖에서 조용히 듣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죽음을 마주하고 준비하는 일상은 담담할 뿐이다. 영화는 눈물 없이 차분한 정원의 일상을 따라가며 슬픔을 겹겹이 쌓아간다. 그러면서도 슬픔으로 점철되지 않는다. 관객으로서 끝을 예견할 수 있음에도, 영화 속 시작하는 연인들의 자잘하고 섬세한 장면들은 연애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설레게 한다. 특히 골목을 걷던 중 다림이 팔짱을 끼자 움찔하며 부끄러워하는 장면, 소식 없는 정원의 사진관 문틈에 편지를 끼워 넣었다 다시 찾아가 빼려고 시도하거나 결국 돌을 던져 사진관 창문을 깨고만 다림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풋풋한 첫사랑이 느껴졌다.

정원의 일상 속에 스며든 다림과 즐거운 한 때, 영화 속 아이스크림 먹는 장면
혼자 남겨질 아버지에게 비디오 조작법을 알려주는 정원, 영화 속 한 장면


※여기서부터 스포일러가 있으니 아직 영화를 안 보신 분은 넘어가 주세요~ 꼭 영화를 통해 직접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난 그 남자의 사랑법

20대의 풋풋한 사랑을 시작한 다림과 달리 시한부 인생을 받아들인 30대 남자의 사랑은 현실적이어서 애잔하기만 하다. 퇴원하고 편지에 답장을 써서 찾아간 뒤에도, 그녀 앞에 나서지 못한 채 창문 너머로 다림을 지켜볼 뿐이다. 마치 어루만지듯 그녀의 모습을 따라가는 정원의 손 끝 움직임이 프레임에 가득 담길 때 ‘끝이 정해져 시작조차 못하는 안타까움’은 그 어떤 말이나 절규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필연적으로 남겨질 그녀를 생각하며 그렇게 물러서야 했다. 사랑한다고 전하지 못하는, 그의 이기적이지 못한 사랑이 먹먹할 만큼 눈물겹다. 나라면 참지 못하고 달려 나가 사랑하는 이를 끌어안고 죽을 때까지 옆에 있어달라고 울고불고 애원하고 매달릴 거 같아서 더 마음이 복잡했다.

창 너머 다림을 바라보는 아련한 눈빛의 정원 ☜ 이때 제일 공감하며 울컥했던 장면

영정사진이 된 낡은 사진 속, 환한 웃음을 짓는 한석규의 선한 얼굴에는 ‘죽음’이라는 끝을 수용하고 평온한 일상을 담담히 살다 간, 정원의 인생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전해져 온다. 그러한 시선은 영화 전반 곳곳에 묻어있고 그를 지켜보는 관객에게도 조용히 흐른다.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 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 정원(한석규)의 독백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난 그 남자는 그 여자가 ‘남겨진 사랑’에 아파하지 않도록 ‘추억’으로조차 남겨지길 원치 않았다. 그래서 끝내 부치지 못한 편지 속 그의 마음은 관객들 가슴에 아로새겨졌다. 잔잔한 호수에 떨어진 물방울이 일으킨 파동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듯, 화려하거나 요란하지 않아도 깊은 울림과 여운을 남겼다.


나 역시도 긴 여운으로 이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그 남자의 사랑을 목격한 한 사람의 증인으로서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정원의 일상 속에 스며든 다림과 즐거운 한 때-, 영화 속 오토바이 데이트 장면



<참고: 영화 줄거리 발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나는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랑을 하고 있다.

서울 변두리에서 작은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는 정원(한석규). 그는 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으며 그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어느 날, 정원의 사진관에 다림(심은하)이라는 아가씨가 나타나는데, 그녀는 정원네 사진관 근처에서 일하는 주차 단속원으로 매일 비슷한 시간에 사진관 앞을 지난다. 자신이 단속한 차량의 사진을 맡기는 다림은 차츰 정원의 일상이 되어간다.

다림은 정원의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정원은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기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짧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다림이 사진관에 오는 시간을 기다리게 된다. 그러나 정원의 상태는 악화되고, 어느 날 그는 병원에 실려 간다. 정원의 병을 모르는 다림은 사진관 앞을 서성인다.

기다리다 못한 다림은 편지를 써서 사진관 닫힌 문틈에 욱여넣고, 집으로 다시 돌아온 정원은 다림의 편지와 그녀의 사진을 보면서 눈물을 떨군다. 그날 이후 다림은 더 이상 사진관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이브. 다림이 사진관을 찾아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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