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한 추억을 기억하며
25년 10월 17일 06시 35분
어제와 다른 아침이다. 당연한 말인데, 오늘은 어제처럼 비가 오지 않는다. 어제의 비로 인해 한층 아침 공기가 더 차가워진 느낌이다. 이러다 곧 추위가 노크 없이 갑자기 찾아올 것이다. 요즘 날씨가 그렇다. 여름과 겨울은 확실한데 봄과 가을은 ‘왔나’ 싶음 지나가 버린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 계절로 점점 잊혀져 가는 것 같다.
어제는 K의 이야기를 하다 K의 주변 여자사람 친구소개를 했었다. 그러다 보니 내 주변 여자사람 친구도 한 명 떠올랐다. 마늘처럼 알싸한 아련함을 선물한 친구. 오늘은 이 친구 B를 소개하겠다. 글을 쓰다 보니 내 주변에도 여자사람 친구들이 제법 있었다. 정식으로 교제한 친구는 거의 없지만, 그래도 나의 젊은 시절 나를 설레게 하고 밤하늘의 별똥별처럼 잠깐씩 아주 짧게 빛나는 시간을 만들어주었다.
B를 소개하기 전 먼저 우리 동기들 인원 구성을 소개하자면, 정원 40명에 거의 50:50으로 남자 반 여자 반으로 이루어졌다. 초등학교 졸업 후 이렇게 많은 여학생들과 같은 반을 구성해 본 적이 없었기에, 난 대학에 입학하고 초등학교 7학년을 다니는 느낌을 받았다. 신입생들이고 남녀가 반반씩 섞여 있는 조직이라 그런지 우리들의 수업시간은 무언가 말로 설명하기 힘든 설렘과 음양의 조화?로 한 겹 더 두꺼운 공기의 질을 나타냈다. 나만 그랬나? 대학에 가면 이성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그리고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같은 기류가 흐르고 있었던 거 같다. 하지만 이런 기류와 달리 아무도 CC가 되지는 않았고, 지금까지도 우리 동기들의 CC는 단 한 명도 없다. 신기하다. 몇 친구들이 CC가 되기 위해 노력은 했지만, 동기들 사이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듯 좀처럼 CC로 발전하는 친구들은 없었다. 초반탐색의 과정과 썸 타는 정도에서 모두 마무리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모르는 역사가 있을 수 있지만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
대학 초 단체 미팅관련해서 의뢰가 들어왔고 1학년 총대인 친구가 단체 미팅 관련 의견을 동기들에게 구하고 있었는데, 미팅은 우리 남자가 타 대학 여학우들과 만남을 갖는 내용이었다. 우리 남자동기들 사이에서 웅성웅성거리며, 그곳 여학생들이 외모가 어떤 지 의견을 나누고 들떠 있었는데, 정작 다수결 투표에서는 우리 남자 동기들 단체 미팅이 부결되었다. 일부 미팅에 중요성을 모르는 남자 동기가 반대표를 던져 일을 크게 만들었지만, 정작 우리랑 아직 CC도 만들지 못하고 미온적인 태도를 취해오던 여자 동기들이 단체로 미팅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자, 우리 남자 동기들은 단체로 어안이 벙벙했다. ‘뭐야 우리가 계륵도 아니고 남친으로 만들 자니 싫고 딴 데 주자니 아까운 건가?’ 이런 이중적인 우리 여자 동기들의 모습은 아직도 이해를 못 하겠다.
왜 그랬을까? 우리 남자 동기들이 단체 미팅 한번 해 보겠다는데, 거기에 어깃장을 놓고 미팅에 반대한 여자동기분들, 지금이라도 의견을 듣고 싶네. 그런데 역으로 여자동기들이 타 대학 남 학우들과 단체미팅 의뢰가 들어왔다면, 나도 반대 의견을 던졌을 거다. 이 참 미묘한 마음, 1학년 우리 동기들 사이에 이런 미묘한 기류가 계속해서 돌았다. 학기 초반 조별 수업을 받으면 의례 그랬던 거처럼 혼성 조 구성은 거의 없었는데 2학기가 되면 조금씩 혼성 그룹도 생기고 우리 동기들 사이에 미묘한 기류에 조금씩 변화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1년 내도록 남자 동기들과 그룹을 짜서 했었고, 이 친구들과는 EOS(Elite Out Side)라는 그룹명을 만들어 놀았다. 다른 남자동기들은 MBC라고 해서 Maritime Billiard Club을 만들어 당구를 치는 친구들끼리 모임을 만들곤 했다. EOS는 나에게 특별한 친구라는 추억을 만들어 주었고, 지금도 이 친구들과 연락을 하면서 지낸다. 이 EOS에는 위에서 소개한 M이 있다. 이때부터 M과의 인연이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반평생 넘게 친구로 지내고 있다.
B는 부산출신이다. 학장동에 살았고, 매번 학교를 올 때 8번 버스를 탔다. 나도 1학년 때는 외삼촌 댁에서 1학기 생활을 해서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해야 했는데, 8번 버스는 우리 동네도 지나갔다. 버스를 기다릴 때 8번 버스가 오면 설레고 기분이 좋았다. 혹시나 B를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다른 버스와 8번이 같이 오면, 망설이지 않고 난 8번을 탔다. 운이 좋은 날은 B를 만날 수 있었는데, B를 보았다는 나의 반가움과는 반대로 B는 나의 존재를 몰랐다. 매번 은 아니 어쩌다 버스에서 마주치면 B는 항상 눈을 감고 자고 있었기에 B는 내가 버스 타는지 유무를 몰랐을 것이다. 난 버스를 타면 뒷 좌석 쪽으로 가서 B를 응시하면 학교까지 가곤 했다. 정류장이 몇 개 되지 않아 짧은 시간이었지만, 설렘과 기쁨이 어우러져 웃음이 자연스레 묻어나는 행복한 도파민 방출의 시간들이었다. 요즘도 8번 버스는 지나다닌다. 버스노선 조정이 있었지만 8번은 살아남아 있고, 그 버스를 볼 때마다 괜히 더 반갑고, 뭔 지 모를 이상한 기운이 날 감싸고 지나간다.
B의 대한 첫인상을 기억하는 공간은 영어회화 수업을 앞둔 한 1층 강의실에서였던 거 같다. 다른 수많은 동기들 중에서도 B만 유독 잘 보였고, 드라마나 영화 보면 항시 나오는 레퍼토리처럼 마치 서울에서 시골로 전학 온 학생처럼 나에게 눈이 부신 존재였다. 그렇게 B는 나에게 빛을 비춰주었다. 그래서 난 해바라기라고 하기엔 너무나 크고 술도 마시고, 기존 지구에 존재하는 해바라기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이상했지만, B의 빛에 의해 해바라기가 되어 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 빛을 나만 보았다는 게…
시간이 지나고 동기들과 소주 한잔 하며 조금은 예민한 그러나 모두들 알고 싶어 했던 이야기를 할 때면 나는 B가 좋다고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항시 그랬듯 별명도 지어주고. 나는 친구들 별명을 참 잘 만들었던 거 같은데, B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지어준 B의 별명은 우리나라 역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그래도 엮어 보려면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그런 닉네임을 만들었다. 그건 바로 ‘곰순이’. 내 마음속에 곰순이로 B를 호칭하며 난 B를 바라봤다.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한 게, 아니면 친구들 입이 포스코에서 생산하는 코일처럼 무거운 건지, 또는 나의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공중에 떠다니는 질소보다 가볍게 여긴 건지, 내가 B에 가진 마음에 대한 소문은 도통 나지 않았다. 그래서 어제도 잠깐 소개했지만, 1학기말 B와 단둘이 있을 때 나의 마음이 이랬다는 걸 전달하려 했을 때 B는 놀라는 눈치였다. 1학기 동안 B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주변 동기들에게 그리 많이 이야기를 하고 다니었겄만 것만, 아무도 나의 이야기를 B에게 전달해 주지 않았다는 게 너무나 신기하다.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우리 동기들 사이엔 이상한 기류가 한 겹 더 있었을지 모른다. 특히 이성동기들 간의 교제에 대해서는 엄격히 금지한다는 뭐 그런 식의 기류가 있었던 게 아닌지 진지하게 의심해 본다. 그래서 아무도 CC가 되지 못한 것이었나? 아니면 내가 모르는 학과의 전설 또는 학교의 전설이 있나? 이런 주술적인 무언가가 우리의 만남을 방해하는 건가? 이루지 못했기에 별 이상한 이유를 가져다 붙여본다.
나는 B와 다른 동기들과도 어울려 학교생활을 잘했다. 가끔 차도 마시고, 수업 리포트도 공유하며 일상적인 생활을 했다. 물론 나의 마음은 해바라기처럼 바라보고 있었지만, 더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없었던 건, 학기 초 B는 남자친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동기로 지내면 된다며 나에게 스스로 위안과 해결책을 제시하며 생활했다. 그때가 좋았다. 그렇게라도 주변에서 만나고 같이 지 낼 수 있던 시절이.
나의 어린 욕심에 어설픈 고백을 한 후로 2학기부터는 1학기와 같은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계속해서 B를 바라보았지만, 내 행동은 마음보다 더 멀리 겉돌기 시작했고, 내가 B를 피하고 다녔는지 모른다. 강의시간에 자연스럽게 주변에 앉을 수도 있는데 난 언제나 저 멀리 뒤에 앉아 수업을 받았다. 그렇게 2학기를 보냈고, 그 이후로 B와 같이 한 대학생활은 끝이 났다. B와 난 휴학을 했고, B는 재수를 나는 군대에 입대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날 수 없는 사정이 생겨버렸다. 00년 B는 타 대학 1학년으로 입학을 했고 난 그다음 해 2학기 학교로 다시 복학했다. 우리 동기들은 4학년이 되어 있어 그 남아 학교에서 몇 번씩 마주칠 수 있었는데 B는 완전히 떠나고 없었기에 볼 수가 없었다. 타 학교에 찾아가 볼까 생각도 했지만, 어휴 또 무슨 찌질한 행동을 할까 예상되어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어찌 보면 그렇게 하지 않은 게 다행일지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한 이유는 98년 2학기말에 했던 나의 행동 때문이었다. 그때 우리에게는 '삐삐'란게 있었다. 난 삐삐에 며칠 저녁 어디에서 보자 메시지를 남기고 그곳에 가 B를 기다렸다. 대단한 용기였다. 평소 말도 별로 하지 않고 대면 대면하기만 했는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일방적으로 정한 약속장소에 나가 B를 기다렸고(B의 말에 따르면 우연이라는 데) 약속시간 이 조금 지나고 난 B를 만날 수 있었다. 약속 시간을 조금 넘겼다는 가벼운 인사로 반가움을 표시했고 우리는 저녁을 같이 먹었다. 그것도 처음 단둘이 먹는 마지막 저녁.
식사 중에 내가 삐삐 쳤는데 내 메시지 확인 했었냐를 물었고, 그때 B는 몰랐었고 우연히 지나가다 나를 본 것이라 했다. 이게 진심이 아니길 바랐지만, 결과적으로 같은 공간에 앉아 마주 보고 있으니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깨달았다. 삐삐는 내가 보냈지만 상대방은 메시지를 나와는 반대로 매번 확인을 안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만약 B의 말대로 메시를 확인치 않고 우연히 우리의 만남이 없었다면, 난 지구 어느 누구보다 비참한 남우 주인공이 되어 그날 밤을 헤매다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를 B와 저녁 식사를 하고 기숙사로 복귀했고, 그 이후로 B와 약속을 잡고 만나 본 기억은 없다. 정말 우연히 지나다 예전 약속장소 어느 부근에서 만나적이 있다. 그때는 지금의 아내와 같이 길을 걷고 있었는데 저 멀리서 걸어오는 B를 보며 그냥 지나갈까 아님 아는 척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는 동안 난 아는 척을 했고, 무슨 배짱으로 그랬는지 집사람과 B를 서로 소개했다. 그리고 뒷 끝을 남기는 말을 남기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 이후로 B는 만나지 못했지만, 뜻밖의 친구 C로부터 B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C는 내가 재수하기 전 잠시 다녔던 D대학 동기. 사람관계 좁다더니 이렇게 B와 C가 연결이 될 줄 그 누가 알았으랴.
마지막 뒤 끝의 말은 이거였다. B와 아내를 소개하며 B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너보다 예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