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도 동아리가 생겼어요
25년 10월 20일 아침 06시 46분
이제 아침 온도가 제법 가을 같다. 오늘 아침 온도 15도. 지긋지긋했던 더위도 물러가고 곧 겨울이 올 것 같다. 주말에 책을 읽기 위해 금요일에 도서관에 갔었다. 조정래 작가 소설책과 다른 작가분들의 수필집을 빌려 오려했는데, 나머지는 다 빌려 왔는데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 2권은 빌려오지 못했다. 대출 번호를 찾아 그곳에서 만남을 기대하며 약속장소로 갔지만, 2권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선택이 되어 외출을 나가고 없었다. 한편으로는 아쉬움과 다른 마음으로는 괘씸함이 차 올랐다. 누가 가져간 것인가? 나 말고 아직 안 읽은 사람이 있단 말인가? 내가 제일 늦게 찾아온 줄 알았는데, 나 말고도 다른 이의 방문이 있는 걸 보니 역시 대단한 작가님의 작품인 것을 다시 한번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 보고 싶어진다.
오늘 아침 맑음. 창 밖으로 가끔씩 들려오는 클락션 소리와 지게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새로운 한 주를 준비하기 위해 모두 바쁜 아침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소리. 오늘 나도 약속이 있어 출장(?)을 다녀올 계획이다. 직장인도 아닌데 출장이라니 거창한데 지인을 만나기 위해 포항에 갔다 올 건데 여행이라고 하니 조금 뜻이 맞지 않고, 출장이라고 하니 내 상황과는 안 맞고. 딱 맞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저번 주 B를 소개하며 주말은 설레고 아련하고 행복했다. 누군가를 추억하며 이런 모드로 전환되어 생활할 수 있다는 게 참으로 신기하고 글을 쓰며 느낄 수 있는 행복 같다. 20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고, 마늘 맛 같은 추억을 떠올리며 B의 안부를 묻고, 나의 안부도 전하고 싶었다.
B가 타 대학에 입학하고 그리고 대학원에 진학을 했을 때 위에서도 잠깐 이야기한 친구 C로부터 B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제 B와 C, 그리고 나는 모두 아는 사이다. 분명 B와 C 사이에는 연결고리가 없어 전혀 모르는 남이었을 텐데, 이제 대학원 동문이 되어 둘이 서로 알게 되고 나와도 네트워크 연결선이 접속되어 우리 모두 알게 되었다. 이렇게 셋이 모두 아는 사이가 되었지만, 다 같이 만난 일은 없었다.
C가 누구인지 소개를 하겠다. 나는 재수를 하기 앞서 잠시 한 학기 동안 대학을 다녔다. 재수를 하겠다는 걸 아버지가 한 학기라도 다녀보고 대학이 어떤 곳인지 느껴보라는 권유를 하셔서 그럼 재수는 나중에 해야지 하는 마음과 놀고 싶은 마음이 맞아져 난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듯 행동했다. 그래서 입학한 첫 대학. 우리 동네 대학이었으면, 고등학교 동창들이 한두 명은 있어 외롭지 않았을 텐데, 97년도 부산으로 오면서 아무도 없는 외딴곳으로 혼자 유학을 왔다. 입학생이 4천여 명 정도 되었는데 내가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있었을 수도 있다. 나의 부산 초등학교 동기들이 같이 입학을 했을 수도 있지만, 서로 모르는 사이와 다름없는 지금 나는 철저히 혼자인 이곳에 자진해서 입학하게 되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혼자 있자니 외로움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공강 시간에는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다음 시간을 기다리며 라디오를 들었다. 그리고 수업시간이 다가오면 강의실에 들어갔고, 혼자 뒤편에 자리를 잡고 강의를 들었다. 신입생의 활기로 가득 찬 강의실에 나 혼자 할배 같은 느낌으로 조용히 그리고 쓸쓸히 앉아 수업을 들었다. 그때였다. 나에게 말을 걸며 다가온 사람. 바로 C였다. 그때 C의 모습은 파격적이다 못해 ‘동네 양아치’ 느낌이었다. 한쪽 귀에 귀걸이를 했고 머리는 파마 같은 스타일, 옷은 힙합댄서처럼 헐렁하게 입고 있는 모습. 전혀 내 주변 친구들과는 찾아볼 수 없는 다름이 C에게 있었다. 그런 C가 나에게 말을 건다. 우린 서로 자기소개를 하고 난 주변에 아는 사람이 없다고 잘 부탁한다고 했던 거 같다. 그러자 C는 최근에 동아리에 가입했는데 같이 가 보지 않을래 권유를 했고, 그 수업 이후 우리는 동방을 찾아가 난 그 동아리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갈 곳 없고, 아는 이 없던 나는 매일 동방을 찾아가서 “신입생 누구입니다.” 인사를 하면서 매일 같이 그곳에서 보냈다. 매일 동방을 찾아가 선배들에게 인사하고 밥을 먹고 한 분 한 분 얼굴을 익히며 나의 인적 네트워크를 확장시켜 나 갈 때, 정작 나를 동아리에 소개한 C는 동아리 방에 오지 않았다. 마치 가입권유만 하고 돌보지 않는 보험 설계사 같은 분처럼 C는 나를 동아리만 주선하고 보이지 않았다. 물론 수업시간에 몇 번씩 보았지만 아직 신입이고 다른 동아리들 가입도 하면서 미처 나를 가입시킨 동아리까지 오기엔 시간이 부족한 듯했다. 그럴 수도 있는 게 C는 부산 출신이고 고등학교 친구들도 학교에 많고 동문도 있으니 여기저기 활동하려면 시간이 부족했으리라. 그에 비해 난 부산출신도 아니고, 동문도 없고, 친구도 없고, 아는 이 하나 없는 쓸쓸한 외톨이었으니, 어디 갈 곳도 없었고, 주구장창 수업만 마치면 동방에 앉아 선배들 기다리며 방명록을 읽는 '낙'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방명록을 읽다가 언젠가부터 나도 한자한자 글을 쓰기 시작했고, 선배님들은 신입이 동방에 와서 방명록도 쓰고 가는 게 신기했는지 나의 글을 보고 요즘으로 치면 댓글 같은 걸 달아 주시면서 호응해 주시고 관심을 가져 주였다. 이런 동아리 선배들의 관심과 보살핌으로 나는 외롭던 학교생활이 아침마다 눈뜨면 빨리 가고 싶어 지는 곳으로 바뀌었고, 타지에 혼자 나와 외롭다던 나의 생활모드는 쾌활 모드로 채널을 바꿔 생활하게 되었고 이건 다 C의 동아리 주선(?) 덕분이다.
나의 동아리는 운동을 하는 동아리였다. 나도 나름 축구, 농구, 탁구 등 일반적인 구기 종목은 얼추 따라는 할 수 있는 운동신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가입한 동아리 운동은 그보다 더 많은 운동신경을 요구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몸은 굳어져 있어서 팔과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다리가 90도 이상으로 찢어지지 않아 자기 전에 방에 누워서 다리를 최대한 찢어 보는 연습을 했었다. 그래도 나의 다리는 90도 이상으로는 더 이상 벌어질 수 없다며, 완강하게 버티었고, 그래서 나의 발차기는 언제나 올라가다 만 초등학교 저 학년 수준의 발차기를 보여 줄 수밖에 없었다. 다들 쭉쭉 자기 키만큼 다리를 올려 멋있는 자세를 연출하는데 혼자 허리정도밖에 다리를 올리지 못하니 볼 품 없고 민망한 건 나와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몫 이었을 것이다.
내가 가입한 동아리는 ‘우슈(武術)’였다. 우리말로 무술. 중국말로 우슈. 태권도의 기본도 모르는 내가 중국의 무술을 배우게 될 줄이야.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내가 부산에서 우슈를 배우고, 볼품없는 발차기를 하고 다닐 줄.
유독 팔다리 잘 못 쓰는 몸치라는 걸 선배들에게 강조하며 우슈를 배웠다. 훈장 선배의 지도에 따라 남권(이연걸 배우가 주로 하는 무술이라고 했다)의 기초를 배우며, 기합도 넣고 폼은 엉망일지 몰라도 이게 '우슈'다라는 느낌을 줄 수 있게 나의 몸은 하나하나 체득해 나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선배들과 나의 자세를 비교하면 미남과 오징어 관계라고 해야 하나. 이게 우슈인지 무용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동아리는 10월 축제 때 공연을 준비하고 위해 여름방학부터는 합숙을 한다고 했는데 난 이미 1학기만 하고 떠날 마음이 있었기에 운동에 더 집중을 하지 못했고 선배와 동기들 만나는 재미에 동방에 계속 나갔다. 그래도 매번 잘하지는 못해도 운동은 참여하려 했고, 어설프게 몇 동작씩 몸에 익혀 가끔 군산에 가면 친구 놈들에게 내가 배운 자세를 보여주곤 했다. 이게 '남권'이라는 건데 말이야 하면서.
운동을 배우면서 알게 된 건 모든 운동에는 기본 정신이 담겨 있다는 것이었다. 태권도, 우슈 모두 몸을 쓰는 ‘무’(武)를 익히는 운동인데 여기에도 사람에 대한 존경과 남의 대한 배려가 있음을 운동을 하면서 알게 되었고, 무슨 운동이든 ‘예’로 시작해서 ‘예’로 끝남이 우리네 생활과 다르지 않음을 배우게 되었다. 그 이후로 운동하시는 분들은 보면 이전과는 다르게 보였고, 작은 만남이 있으면 항시 ‘예’를 갖추려 노력했다.
동아리 이야기를 하며 빠 질 수 없는 선배님 두 분이 계신다. 선배님이라 칭하니 조금 어색한데 다음부터는 형이라고 하겠다. 바로 훈련부장님 J와 별다른 직함이 없었던 Y.
J는 나의 자세를 매번 지적하면서 최대한 올바르게 키우고 싶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의 몸은 그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했고, 그럴 때마다 J는 수고를 아끼지 않고 최선을 다했지만, 난 그의 최선을 도루묵으로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하루 해도 늘어나지 않는 자세와 실력은 “그래 너 1학기 하고 간다 했지.” 가 다행으로 여기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힘든 훈련시간이 마치면 그때는 이해할 수 없는 다음에 일과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대학의 낭만 저녁 술자리. 운동 열심히 했으면 저녁을 먹어야지, 저녁은 먹지 않고 바로 술을 마시러 가는 거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해가 되지만 왜 그때는 저녁을 먹지 않고 바로 술을 마시러 가는 도통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이때만 해도 갓 입학한 신입생이었으니, 술과는 아직 내외를 하고 있는 사이였다.)
차츰 그런 술자리가 좋았고 처음으로 취해 버스를 타고 집에 갈 때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 알았다. 술 취한 연기를 보면 흥얼거리고 비틀거리던데 이게 거짓이 아니구나, 모두 혼을 담을 연기를 하셨다는 걸. 그리고 술에 취하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래서 모두 취하려 하나보다 섣부른 일반화를 하기도 했었지만, 술을 마시는 재미를 조금씩 알아 가게 되었다.
한때 아버지가 물으셨다. 왜 술을 마시느냐고? 그때 난 아버지께 “아버지 술 마시면 기분이 좋아져요”라고 대답한 적이 있는데 이건 신입생 때 알기 된 경험을 바탕으로 말씀드린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