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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과의 만남은

이건 운명인가 인연인가?

by 시쓰남

25년 10월 31일 오전 07시 01분


10월의 마지막 날. 가수 이용은 ‘잊혀진 계절’로 이때만 되면 제일 바쁘다고 들었는데, 오늘이 바로 노래가사에 나오는 그날이다. ‘10월의 마지막날.’ 오늘도 분명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것이다.

나에게도 오늘은 뜻깊은 날이다. 바로 오늘이 우리의 결혼기념일이기 때문이다. 어제는 미리 아내와 맥주 한 캔으로 오늘을 기억하는 조용한 기념을 했다. 벌써 15주년이라니. 집 사람과 연애를 하고 결혼해서 사는 기간이 20년이 넘는다. 아직 내 인생의 반은 되지 않았지만 차츰 절반을 넘고 거의 모든 시간을 같이 보내는 삶이 되겠지. 점점 ‘나의 시간’보다 ‘우리의 시간’이 많아지는 삶.


아내와 난 대학교에서 만났다. 같은 과 선후배 사이였다. 흔히들 말하는 CC. 그토록 입학초기에 해 보고 싶었던 CC를 복학하고 1년이 지난 후 3학년 마지막쯤 이루게 되었다. 주변에 노력들이 우리의 CC를 성공케 도와줬으며, 그 많은 이들의 노력에 그리고 우리 둘의 숙명 같은 인연에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우리는 7년 정도 연애를 하다 결혼을 하게 되었다. 연애를 오래 해서 모든 걸 다 알고 있을 거란 생각은 신혼 초 잦은 부딪힘으로 어리석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각자 살아온 패턴이 달랐다. 나는 남자로, 아내는 여자로. 나는 우리 집 장남으로, 아들로, 아내는 처가의 막내로, 막내딸로.

집안일을 도우며 우리의 생활패턴이 많이 다름을 알 수 있었다. 신혼 초 모두 그렇듯이 나도 집안일을 돕기 위해 나름 일 손을 거들었는데, 이건 또 하나의 배움의 장이 마련된 공간이었다. 수건을 접는 법, 설거지하는 법, 빨래 정리하는 법 등 모든 법들이 나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기존의 내 ‘생활의 법’은 철저히 내 위주로 만들어지고 집행되었는데, 우리 둘이 함께 하면서 참고하게 되는 생활의 법은 철저히 집사람 위주의 법으로 돌아갔다. 기존의 나의 방식들은 대체로 ‘야매’ 거나 표준화되지 않은 걸로 간주되어 우리 집에 가져올 수 없었다. 그래서 새롭게 집사람에게 이것저것을 배웠다. 그러면서 느꼈다.

‘연애 오래하는 거랑, 결혼생활 하는 거는 천지 차이란 것을.’ 혹시 장기연애를 고민하며 결혼을 생각하시는가? 장기나 단기나 똑같다. 장기의 메리트는 그저 얼굴 오래 봐서 아내의 표정으로 심기가 어떻다는 걸 빨리 알아 체는 정도의 장점만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다들 처음이기에 새롭고 낯설 것이다. 어여 빨리들 들어오라. 여기는 행복한 Hell이다.

내가 아내와 본격적으로 연애를 하고 학교에 소문이 난 건 이맘때쯤 열리는 피프를 다녀오면서부터였다. 우연히 응모한 이벤트에 당첨이 되면서 피프 영화표가 여러 장 생겼다. 그걸 가지고 집사람과 여러 편의 영화를 보면서 학과 내에 잔잔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이후로 진의를 묻는 사람들, 도와주겠다는 사람들이 모여 우리는 CC로 발전하게 되었다. 학과에는 기존에도 몇 커플이 있었지만, 우리의 동참으로 한 커플이 더 늘게 되었고, 우리는 몇 안 되는 결혼까지 성공한 커플로 남아 있다.

한참 서로를 알아가고 있을 때, 아내를 집에까지 자주 데려다주었다. 주로 버스를 타고 다녀왔지만, 그날은 걸어서 집사람을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천천히 걸었기 때문일까? 3시간 정도 걸어서 처가에 도착했는데, 그때의 일이 생각난다. 한참 걸어서 처갓집과 학교사이 중간쯤에 도착했을 때, H조선소를 지나고 있었다. 그때 한 무리의 남자들이 우르르 버스에서 내리더니 초등학생들이나 할 법한 놀림을 하며 도망갔다. 바로 저번에 소개했던 K(14일자 소개 편)와 그 무리들이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 우리를 발견하고, 바로 그다음 정류장에서 내려 우리를 바라보곤 유치하게 놀리고 지나갔다. 큰 소리로 ‘얼레리 꼴레리’를 하며 우리를 향해 다가왔고,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시 오는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뛰어갔다. 우리 둘은 갑작스러운 K와 그 무리의 출현으로 당황했지만, 주변에 계시는 일반시민분들은 더 놀라셨을 것이다. 목청도 크고 못 생긴 남자 여러 명이 갑자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됐으니 얼마나 놀래셨을까? 우리는 웃음으로 다가오는 남자들을 반기었고, 그들은 부끄러움에 우리의 환의를 저버리고 멀리 달아났다. 나중에 만나 그때 왜 그랬는지 물었는데, 막상 버스에서 내려 니들을 놀리는 게 재밌기는 했지만, 이 나이 먹고 그랬다는 게 쪽팔려서 현타가 왔다고 한다. 그때는 버스 환승도 없던 시절인데, 우리 데이트하는 모습 포착하고 한번 놀려줄 거라고 내린 무모한 K와 무리들. 우리에게 추억을 만들어 줘서 고맙다. 그래서 그때 보답한다는 마음으로 나도 K에게 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어 줬었다. 가로등 밑에서 기다리며 K를 불러봤고, B선배랑 잘되길 기원하며 나름 노력도 했었는데. 이게 다 우리의 상부상조 마음이 아니었겠나.


연애를 하니 생활비가 많이 들었다. 평소에 지출항목에 없던 교통비가 꾸준히 나가고, 외식비도 나가고(난 기숙사라 외식할 일이 잘 없는데). 대신 친구들과 마시는 술값이 줄어들어 이 모든 걸 충당할 수 있었던 거 같다. 매일 하리에서 선후배들과 소주를 마시며 하루를 정리하던 루틴이 변화면서 주변 친구들과 소원해지고 술자리 갖는 횟수도 줄이게 되었다. 그래서 친구들 사이 배신자로 찍혀서 ‘머슴아 니가 그러면 안 된다.’라는 핀잔도 많이 받았다. 그때 모두들 짝이 없던 시절이라 그렇게 우리끼리 노는 게 의리인지 알 던 시절. '형아는 청춘 사업한다고 바쁘다. 그걸 니들이 어찌 알겠냐?'라고 말이라도 할라치면 "어디서 운 좋아서 연애하는 게 큰 소리냐?"며 오히려 역정을 내곤 했다. 아직도 이런 비슷한 말은 자주 듣는다. 넌 운이 좋다. 만약에 아내를 못 만났다면 너도 지금의 그들과 다르지 않게 혼자 살 거라고. 가끔 그런 상상을 해보긴 한다. 너무 삶에 지쳐 찌들어서 그리고 아내한테 혼날 때. 아 혼자 살면 어떤 느낌일까? 이 모든 어깨 위의 짐들을 벗어 버릴 수 있을까 하고. 하지만 결론은 난 운이 좋고 행복하다는 사실이다. 갑자기 너무 미화하는 거 아니냐 오해할 수도 있는데. 나는 항상 결혼생활을 행복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끔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지만, 다들 그렇지 않나?


오늘은 결혼기념일. 점심때 맛있는 식당에 가려고 하는데 아직 메뉴는 정해지지 않았다. 집사람한테 오더를 넣었는데 무얼 먹고 싶은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고 한다. 난 국밥이 땡 기는데. 오늘은 집사람이 원하는 것을 사줄 것이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운이 좋은 내가 친구들에게 언제나 떳떳할 수 있게 해 준 사람이니까. 주변 친구들 중에 아직 솔로인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우리의 연애사를 아는 그 솔로들은 하나같이 이야기한다. 나의 결혼은 ‘운빨’이라고. 난 이 운빨로 내 평생 운을 다 소진한 걸까? 왜 이렇게 풀리는 게 없지. 하지만 이런 나에게 아내가 있고 애들이 있어 좋다. 다 각자의 삶이 다르듯 내 삶에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겠다. 주변 친구들에게도 운빨이 작용하기를 기대하며, 오늘은 혼자인 친구들에게 이용의 ‘잊혀진 계절’을 들어보라고 권해야겠다.

오늘은 우리의 결혼기념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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