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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은 Apr 13. 2021

불 좀 꺼주세요

_ 미완의 글


어떤 땐, 빛이 없는 어둠에 잠기고 싶어.

눈이 시린 날, 찾지도 않은 눈물이 고개를 빼꼼히 내미는 날,

눈꺼풀 안으로 숨어도 빛이 느껴지는 날, 종종 그런 때 밤을 기다리곤 해.


밤은 늦장을 부려.

바쁜 티를 내면서 마중이란 마중은 다 해주고 느지막이 내 공간에 스며들어.

눈치도 보면서. 달빛을 숨기기도 하면서.


방 안에는 밤과, 나, 소외된 소음만이 남았어.

그때가 새벽 두 시가 지났을 때 일 거야.  

긴장을 몰아내고 의자에 앉은 채로 잠시 나도 전원을 꺼.

축 처진 팔과 바닥에 닿는 머리칼까지 소실된 에너지로 잠시 죽고,

나는 때 마침을 누려. 밤, 그런 밤을 만끽해.




공간은 죽고 나는 그 공간을 이루던 작은 세포에 지나지 않아. 잠시 떠돌다 함께 죽음을 맞겠지. 무르익는 밤 동안에 죽음이 파다하고 짧은 찰나의 성숙한 고요가 지나면, 깨어나는 생명의 유년의 빛이 공간으로 물들어. 공격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교체가 일어나.

밝아 오는 것에 밀려난 어둠에 죽음도 함께 떠나고 빈 공간에는 어김없이 생명의 기척이 드리워져.

공간의 관심 밖에 존재했던 먼지는 중력을 가지고 놀며 아래와 위의 구분 없이 빛 안에서 자유로이 반짝이며 존재를 나타내지. 가치의 의미가 사라진 세상에는 유익한 움직임으로 환대받는 먼지는 눈부셨어. 죽음이 희미해진 낮에 떠도는 시야가 부담스러운 나는 다시 밤을 기다려. 잠시 떠돌다 죽음을 맞이할 이 공간 안에서 무형의 존재로 반짝이는 먼지를 선망하며 꿈속의 1인칭 시점으로 나는 나를 끝내 마주하지 못해. 공간을 이루는 모든 현상을 세세하게 서술할 뿐.

그리고 혼란스러워하지. 공간이 나였는지, 세포가 나였는지. 내가 죽은 것인지. 공간이 죽은 것인지. 세포로 이루어진 공간은 세포 그 자체였는지. 나는 의문을 갖지만 비춰 볼 수 없는 시점으로 매일 죽음을 겸허히 맞아. 깨어나는 날은 반드시 자유로운 먼지를 선망해. 공간엔 밤이 찾아와. 죽음은 반복되고 공간은 세상이 되어주지 않아. 그렇다고 밤이 하루가 되지도 못하지. 빛나는 것은 모두 떠오르고 자유롭던 움직임은 숨죽인 채 가라앉아있어. 밤은 작은 틈도 남겨두지 않고 공간의 곳곳을 삼켜. 구석진 어딘가에 소복하게 모여든 먼지 뭉텅이가 한 번도 반짝인 적 없는 듯이 색을 잃고 무의미한 존재로 숨죽이고 있어. 밤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처럼.

가만히, 아주 가만히.


밝음과 어둠에 관여하지 않는 시점은 죽음도 삶도 없는 영원의 존재가 되어, 공간을 이루는 시간을 기억해. 기어코 자신의 죽음을 서술하지.

밤엔 전원이 꺼진 시체들과 함께 고요한 소음이 깨어나고 적막의 파티가 열려. 그 속에서 숨어있는 먼지와 대조되는, 움직임이 없는 몽상의 흥분이 모습을 나타내지. 갖춰 본 적 없는 형체들의 현란한 시간이 흘러. 나는 나를 봐. 전원이 꺼진 채로 축 늘어진, 잠시 동안 밤의 죽음을 맞이한 나를.


소복한 먼지의 밤은 죽음이며, 자유로운 형태로 반짝이는 낮은 삶일까. 시점을 잃어버린 낮엔 생명이나 존재하지 않았고, 나를 잃어버린 밤에는 존재하나 생명의 빛을 잃어. 그걸 죽음이라 불러. 그렇다면 나의 세계는 낮일까, 밤일까. 꿈을 꾸는 것일까. 꿈을 살고 있는 걸까.


자, 이제부터 생각하는 거야.

공간이 누구였는지. 영원의 존재로 공간을 서술하던 세포에 지나지 않은 내가 무엇이었는지, 살아 있다는 것은 영혼의 깨어남인지, 단지 시각의 깨어남인지 말이야. 밤이 와. 질문을 달고, 답을 할 시간이 왔어. 나는 어김없이 자리에 앉아 전원을 꺼. 축 늘어진 나를 보며 아직은 성숙하지 않은 시간의 온도에 미간을 좁히고 가만하고도 집요하게 죽음을 바라봐. 고요가 완전하기엔 아직 뜨거움으로.


애초에 탄생으로부터 두 개의 세계를 부여받았는지도 모르지.

서로를 마주 볼 수 없는 달의 세계와 해의 세계.

낮엔 세상의 세계를 돌고, 밤이 오면 전원이 꺼진 나의 세계를 공전해.

숨죽인 낮이 오기를, 언젠가 마주할 일식을 기다리며.





청소를 끝내고 깨끗해진 거실 바닥에 누웠다. 주말엔 역시 대청소라며,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끝 모를 숲을 지나가는 바람처럼 방향을 잃지 않고 숨이 몸속으로 지나갔다.

푸른 잎들 위로 정오의 빛이 물드는 시간쯤. 긴장 없이 편안하게 닫힌 눈꺼풀 위로 내리는 햇살의 인기척에 눈을 떴다. 빛줄기 안에서 춤을 추는 먼지가 이질감 없이 떠 다녔다. 눈이 부신지도 모르고 멍하니 먼지를 봤던 것 같다. 먼발치에서 목을 빼고 황홀한 기분에 젖어 넓은 무대 위에 우아한 선을 그리는 발레 무용수의 단독 공연을 보듯이.

불과 10분 전까지만 해도 기침을 하며 할 수 있는 최대로 인상을 구기고 투덜거리게 했던 먼지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회색의 먼지 뭉텅이를 닦을 때 ‘세상에 먼지는 왜 있는 거야!!’ 그랬고, 갖가지의 의류와 침구에 붙은 먼지가 허공에 날릴 때 혹여나 마시는 숨에 먼지가 들어갈까 불쾌해 했었다. 그랬었다. 고작 10분쯤 전에는.

나는 바닥에 누워 눈부신 먼지를 바라보며 입과 코를 막지도 않고 구겨지거나 불편한 기색이 없는, 황홀한 표정으로 빛과 먼지를 ‘감상’하고 있다.

헛것이라도 본 듯한 표정을 하고 ‘내가 죽을 때가 다 됐나 보다’ 넋두리를 읊는 노인을 닮은 채로.

그리고 생각을 했다. 존재하는 먼지를 존재로 받아들인 적이 있었는가, 하고. 티끌, 가늘고 보드라운 티끌. 빛이 잠들기 전까지, 빛이 생명을 거둬가기 전까지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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