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뻔하게 살아가기
"누가 본다고 그래?"
화를 내거나 비꼬는 말투는 아니었다.
지난 여행 때 물놀이를 나가려고 먼저 아이들 준비를 마친 후 남편과 내 것의 래시가드를 챙겨 들었다.
몸 위로 코팅한 듯 밀착된 상의 지퍼를 올리고 나니 반바지 밴딩 위로 불룩 튀어나와 잡히는 살이 신경 쓰여 작게 투덜거리는 것을 남편이 듣고 한 마디한 것이다.
아니 같은 말을 2번이나 반복했다. 이마 위로 로딩 중인 동그라미가 여러 차례 그려졌지만 입을 벌리고 남편을 멍하니 쳐다보다 짧은 순간이 지나갔다. 요즘 간이 부은 상태냐고 짜증을 냈어야 했나 하는 후회가 뒤늦게 찾아왔다.
미리 말하자면 남편은 저 말만 가지고 나무라기에는 억울한 면이 있다.
다릿살을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배달시킨 치킨에서 닭다리 두 개는 한결같이 손대지 않는다거나 끼니때마다 밥을 제대로 챙겨 먹는지 연락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휴일 일정을 계획하기 전에 가고 싶은 곳이나 먹고 싶은 것을 아이들보다 나에게 먼저 의견을 묻는 사람이다.
누가 본다고 그러냐는 질문에 발끈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에 남편도 포함이라 생각하니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15년 차 부부가 수영복 입은 모습에 설렌다는 것도 비현실적이지만 알고 있는 것을 말로 확인하는 순간 명제가 되어 버린다.
저런 생각은 추호도 모른 채 아이들 물건을 살뜰히 챙기고 이것 좀 먹어보라며 접시에 음식을 담아 건네는 남편을 보며 오버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독였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확신의 뒤에는 나이와 몸매라는 당연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제는 홀딱 벗지 않은 이상 외모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는 힘든 나이이다. 착각하고 살아왔다면 20대 미혼 시절에도 그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누군가 본다는 확신을 가지고 집 밖을 나서기 전 반드시 화장을 하고 옷을 골랐다.
지금은 아이를 등원시키는 짧은 외출 정도에는 '누가 본다고' 하며 세수조차 안 한 민낯에 마스크를 쓰고 나가는 당당함을 장착했다.
결국 누가 나를 보겠냐는 말은 그동안 스스로 되뇌던 말들이었다. 다른 사람의 관심이 불편하던 수줍던 소녀는 남의 이목을 신경 쓰지 않는 아줌마가 되어 버렸다. 정직하게도 나이만큼 뻔뻔함이 자라난 것 같다.
타인의 시선을 배제한 그 공간은 스스로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자리했다. 나의 욕구와 욕망, 좋아하는 것, 원하는 것, 무엇을 하고 싶은지 누구보다 어느 때보다도 관심을 갖고 들여다본다.
오늘도 화장을 고치며 거울을 보는 세심함으로 나를 관찰한다. 찰나와 같은 젊음을 부여잡기 위해 애쓰기보다 지금 가진 것을 소중하게 가꿔 나의 아름다운 미래를 설계하고 싶다.
수영복 위로 튀어나오는 군살을 정리하기 위해 운동도 하고 말이다.
*이미지출처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