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소환
아빠와의 외출은 출발 전부터 돌아오기까지 어느 정도의 긴장감을 감수해야 했다.
어린 시절 친척들이 주말마다 외가로 모이곤 했다. 엄마는 11남매 중 10번째라 이미 몇 분이 돌아가셨지만 손주들까지 모이면 대가족이었다. 발 디딜 틈 없는 거실과 외할머니가 앉아 계신 안방을 넘나들며 이모들이 해준 음식을 먹고 사촌들과 떠들었다.
간혹, 아니 자주 출발 전에 엄마와 아빠의 말다툼이 있을 때가 있었다. 날 선 몇 마디가 오가는가 싶으면 아빠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가지 않겠다 선언했다. 아빠는 어린애 같은 사람이었다. 다정하고 사랑 표현이 많았지만 부정적인 감정도 숨기거나 참는 법을 몰랐다.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던지는 것도 그에 속했다. 외출 준비를 마친 우리는 아빠를 두고 가거나 가족 모두가 집에 남기도 했다. 친척들의 질문에 엄마는 대부분 아빠가 아프다는 핑계를 댔던 것 같다. 아빠가 예민한 소화 기관과 잦은 두통으로 약을 달고 사는 것을 주변에서 다들 알고 있었다.
무사히 외가에 도착해도 식사 중이나 차를 마시며 대화할 때면 아슬아슬할 때가 많았다. 아빠는 이모나 이모부의 말에서 거슬리는 부분을 기막히게 잘 찾아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거나 내 생각이 짧았다는 반응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시는 못 보겠다 싶게 큰소리가 난 적도 있지만 대개 어른들은 다시 만날 때면 아무렇지 않은 듯 인사를 주고받았다.
쇼핑을 가거나 식당에서 외식을 할 때도 직원의 서비스가 불친절하다 싶으면 투덜거릴 새 없이 이내 아빠의 눈치를 살폈다. 아빠가 일으킨 소란은 사장 혹은 지배인을 불러왔다. 그들은 아빠의 고함을 틀어막듯 입으로는 요란한 사과를 하며 출입문쪽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불편하고 부끄러운 식사는 그렇게 마무리됐다. 고등학교 때부터였나 아빠와 외출하는 것을 피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서더라도 어떤 소동이 일면 먼발치에 떨어져서 얼른 집에 가기를 기다렸다. 언젠가 부부싸움 중에 엄마가 이런 내 태도를 근거로 아빠가 가족을 힘들게 한다는 주장으로 몰아세우는 바람에 아빠가 한동안 조심하는 듯했지만 그때뿐이었다.
함께 외출하지 않고 집에서 아빠의 귀가를 기다리는 것도 마음 편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결혼 이후 늘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던 아빠는 내가 초등학교 무렵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드셨다. 주취자의 늦은 귀가는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귀갓길에 시비도 여러 번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은 내 눈 밖의 일이니 크게 와닿지 않았다. 주로 안주 없이 술을 드셨던 아빠는 아무리 늦은 시간에 들어오더라도 식사를 해야 했다. 엄마는 늦게까지 일을 하느라 주로 할머니가 상을 차렸는데 우리 남매를 밥상 앞에 앉혀 놓고 도돌이표 같은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훈계를 듣는 우리의 태도나 예전의 일들이 소환되어 아빠의 화를 돋우는 경우에는 매를 맞기도 했다.
악몽을 꾸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아빠가 오기 전에 잠들기를 바랐다. 계단을 오르는 아빠의 발소리와 내 심장소리의 불협화음은 나를 두드려댔다. 중학교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일하는 엄마를 대신해 저녁 시간에 아빠가 집에 머무르게 되면서 아빠의 외출은 잦아들었다. 술은 그 이후로도 가족 모두를 괴롭혔지만 아빠는 건강이 안 좋아지며 등 떠밀리듯 금연과 금주를 하게 되었다.
결혼을 하고 내 가정을 꾸린 뒤 더 이상 심장소리에 쫓기지 않았다. 다른 무엇보다도 음주 습관과 주사 여부는 배우자감을 고르는데 중요한 요건이었다. 남편은 술을 자주 먹지 않았고 먹더라도 바로 잠드는 사람이었다. 욱하거나 감정에 휘둘려 예정된 일들을 망치지도 않았다. 지난 시간의 아쉬운 점들에 연연해하지 않아도 될 만큼 안정된 삶에 감사했다.
새해 목표 중 하나였던 새벽 기상을 여러 달째 잘 지켜 그날도 5시에 일어나 책을 읽고 일기를 쓰며 하루를 계획했다. 초봄이라 아직 아침저녁으로는 추웠으나 앞당겨진 해 뜨는 시간 덕에 아침 전야의 어스름과 고요함을 만끽했다. 긍정적인 기운이 나를 향하며 응원하고 있었다.
완벽한 하루가 시작될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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