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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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햇살이 들어오는 거실 한가운데 큰 상이 펼쳐져 있었다. 상 위에는 음식이 가득 채워진 큰 접시들이 빽빽하게 놓여 있고 내 아이들과 조카는 그 주위를 빙빙 돌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둘러앉은 우리들은 모두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상의 가장 넓은 면에 편안하게 앉은 아빠는 환한 웃음을 머금고 아이들을 바라보며 농담을 했다. 따뜻했고 이보다 좋을 수 없다 느꼈다. 여기서 더 욕심낼 만한 것이 무엇일까.
잠에서 깨어나 한참을 꿈의 내용과는 이질적인 불안감에 싸여 께름칙한 기분을 떨치기 힘들었다. 토요일인 전날 엄마가 아빠를 면회하고 와서 통화할 때만 해도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에 의사를 만나 일반 병실로 옮기는 문제에 대해 상의했더랬다. 아프다는 표현도 하며 엄마 말에 반응을 보이니 중환자실에 있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고. 이틀 전 내가 면회를 갔을 때에도 아빠는 나를 알아봤다. 대추처럼 쪼그라든 얼굴에 눈꼬리와 입꼬리가 닿을 듯 웃으며 반가워했다. 현재와 너무나 동떨어진 아빠의 꿈속 모습은 나를 안심하게 하기보다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날 오후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환자가 위독하니 가족들이 병원에 와서 대기하는 게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오르내리는 아빠의 산소포화도를 전해 들으며 숨죽이던 그 밤 엄마와 동생, 우리 부부는 다행히도 아빠에게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었다. 가족들은 아빠의 귀에 붙어 사랑한다고, 미안하다고, 편히 쉬라고 울음 사이사이 필사적으로 말을 흘려 넣었다. 마지막으로 아빠하고 부르는 소리에 아빠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가슴을 들어 올렸다 내리더니 이내 편안해졌다.
입관 때 아빠는 생전 원했던 대로 수의 대신 내 결혼식 때 입었던 양복을 입고 흰 장갑을 낀 두 손을 포개 누워 있었다. 아빠가 흡족하게 여겼을 만한 말쑥한 차림이었다. 살이 많이 빠져 광대와 코가 우뚝 솟아있었지만 주름 없이 뽀얀 얼굴을 보며 고통스러웠다면 마지막 모습이 저렇진 않을 거라 믿고 싶었다. 아빠는 아무리 아파도 반드시 다려 입은 깔끔한 옷을 입고 그에 어울리는 모자를 쓰고 병원에 가던 사람이었다. 수의 대신 선택한 양복은 열두 자 장롱의 대부분을 본인의 옷으로 채운 아빠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옷이었다. 입고 벗기 편안한 내의를 권하던 요양원에서도, 응급실에 실려 오던 순간조차도 아빠는 깃이 빳빳한 셔츠를 입고 있었다.
아빠는 10시간 넘게 길을 잃고 헤맸던 지난번의 밤외출에서 돌아온 후로 누워서 팔만 휘저을 뿐 꼼짝을 하지 못했다. 치매 증상도 심해져 빈방에서 계속 누군가와 대화를 하거나 말을 시켜도 엉뚱한 대답을 했다. 아빠 때문에 수술을 미뤄오던 엄마의 허리는 병시중을 감당하기에는 무리였다. 환자가 풀어헤쳐 놓은 기저귀와 쌓여가는 이불 빨래들 속에서 엄마는 절망했다. 아빠는 아프기 전과 다름없이 이기적인 태도로 많은 것을 요구했다. 엄마까지 주저앉힐 수는 없었다.
아빠의 요양원행을 결정할 사람은 장녀인 나뿐이었다. 아빠는 비교적 정신이 맑았던 시절에도 요양원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거긴 몹쓸 곳이라고 말하곤 했다. 본인은 절대 그런 곳에서 마지막을 맞이하지 않을 것이라고 비장하게 선언했다. 아빠를 요양원에 보내기로 결정한 후 아빠의 정신이 간간히 돌아올 때마다 엄마와 나는 아빠를 제외한 모두에게 최선인 요양원행을 마치 온전히 아빠만을 위한 선택인 양 설득해야 했다.
본인이 원하지 않았던 만큼 아빠의 적응은 예상대로 힘들었다. 아빠는 입원한 순간부터 엄마와의 통화에서 어린아이처럼 조르거나 원망을 쏟아냈다. 필요한 물건들을 나열하며 빨리 면회를 오라고 재촉했다. 이 주만의 첫 면회에는 요양원의 권유로 엄마를 뺀 나와 동생, 남편이 함께 했다. 자신이 나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걷는 연습을 해서 첫 면회에 휠체어나 보행기 없이 두발로 걸어 나온 아빠를 보고 놀라면서도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말을 해야 했다.
"여기가 이제 아빠 집이야. 아빠 도와주는 사람들 힘들게 하지 말고 잘 지내야 돼. 우리가 자주 올게."
한참 후 아빠는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던 아빠의 형형했던 눈빛은 텅 비어 흐려져 있었다. 물막이 덧씌워 먼 곳을 응시하다 굵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빠는 요양원에서 나오기 위해 많은 시도를 했다. 그것이 꼭 집에 돌아오기 위함이 아니라 치매 환자의 증상들이라 하더라도 낯설고 불편한 환경에서 아빠가 모범적인 입소자가 되기는 힘들었다. 동생이 퇴근하자마자 불려 가고 경찰이 출동했다는 얘기에 아이들 저녁을 먹이며 안절부절 휴대전화만 응시했다. 아무도 모르게 요양원 밖으로 나가는 바람에 밤새 요양원 직원들이나 경찰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문닫힌 가게들이 늘어선 시내를 돌며 운전하기도 했다.
수면장애가 있던 아빠는 밤에 잠들지 않고 보호사들을 힘들게 해 요양원 측의 요청으로 정신과 약을 처방받아와야 했다. 나는 요양원에 대한 의심으로 약을 먹지 않으려는 아빠를 달랬다.
"아빠, 내가 의사한테 받아온 약이야. 아빠 편히 자는 약이니까 걱정 말고 먹어."
"우리 딸이 준 거는 독약이라도 먹지."
아빠는 아기처럼 무해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빠는 자주 그런 표정을 지었고 그때마다 나는 외아들을 끔찍하게 여겼던 할머니가 생각났고 자식을 보듯 아빠를 바라봤다.
약이 듣지 않아 강도를 높여 세 번째 받아온 약을 먹고 아빠는 낮에도 잠에서 깨지 못하더니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며칠간 먹지 못하고 기력이 쇠한 채 고열이 지속되더니 폐렴 증상을 보였다. 병원으로 옮겼을 때는 이미 패혈증이 진행 중이었다.
아빠가 요양원에 머문 두 달여와 우리를 떠난 이후에도 한동안, 나는 외출 전에 수도꼭지와 가스밸브를 수십 번 돌려보는 강박증 환자처럼 나의 선택들을 반복해서 되짚었다. 요양원행을 결정했던 순간부터 폐렴에 응급실로 이송하기까지의 결정사항들의 방향성과 타이밍을 하나하나 헤집어 봤다.
어차피 끝이 예정된 여정이라 아빠의 마지막은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그중 어떤 것이 아빠를 더 힘들고 아프게 했을까. 그러다 보면 항상, 어두운 밤거리에서 어디를 향하는지,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로 처음 보는 듯한 길을 끝도 없이 헤맸을 아빠의 마음에 도달한다.
그 막막함과 두려움에 가 닿는 순간 나는 무너져 버리고 만다. 마지막에는 다른 기억들처럼 그 순간들도 머릿속에서 사라졌겠지만 아빠의 영혼에 깊은 상처는 남았을 것이다.
중환자실에서 '아퍼, 아퍼!' 외치는 아빠를 보며 손이 묶인 채로 오래 누워있어 허리가 아프겠다 싶어 자세를 바꿔주고 면회 시간 내내 허리를 문질렀다. 아마도 자존심 강한 아빠는 자신을 잃었던 순간들로 입은 마음의 상처를 토로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기억나지 않는 상처는 치유될 수 없고 그것을 품고 아빠가 떠난 거라 생각하면 마음이 한없이 괴롭다.
아빠가 없는 세상은 놀랍도록 변함이 없다. 가족들의 땟거리를 고민하고 집안일을 하는 틈틈이 아이들을 따라다니다 보면 하루가 어느새 지나간다. 슬퍼도 밥은 입으로 들어가고 아이들 재롱에 웃음도 난다. 아빠의 존재감을 잊고 살아가는 시간들이 너무 미안하면서도 엄마가 미뤄왔던 허리 치료와 백내장 수술을 받게 되어 안도하기도 한다.
한동안 읽기는 해도 글은 쓸 수가 없었다. 쓰기 시작하는 순간 봇물처럼 터져 나올 감정들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아빠에 대한 원망과 그 마음을 담고 아빠를 대한 자신에 대한 자책을 이제는 직면하려 한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괜찮다는 위로에도 옅어지지 않는 일이 있다. 어쩔 수 없었다고 합리화할 생각은 없다. 내 아이들이 무구한 표정으로 하늘을 보고 할아버지 계신 곳이라 가리키며 보고 싶다 스스럼없이 얘기하듯 이대로 아빠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 한 켠에 두고 쓰다듬으며 살아가려 한다.
*이미지 출처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