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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우 Dec 30. 2022

다시, 설레다

나의 책상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첫 책상이 생겼다.

우리 집의 다른 물건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새 가구. 밝은 나무색의 매끈한 표면을 가진 H형 어린이용 책상이었다. 책상 위의 2단 책꽂이 아래에 형광등이 달려있었고, 불을 켜는 스위치가 있는 면 반대편 끝에 피노키오라는 상표가 붙어있었다. 엄마는 입학 축하와 더불어 아빠의 한약값으로 구입한 거라는 말을 보탰다. 그것은 학교에 간다는 멋모르는 기쁨에 젖은 8살에게는 부담스러운 메시지였다. 명분이 있는 책상이어선지 그 곳은 어려운 자리였다.


책상은 단칸방의 TV를 중심으로 오른쪽 벽면에 자리했다. 집에 있을 때면 늘 TV를 틀어놓던  아빠는 입버릇처럼 벼락이 떨어져도 모를 정도로 집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드라마의 결말이 궁금했던 나는 마귀와 같은 TV의 시험에 들지 않도록 자신과 싸워야 했다.  

   

이사를 가며 내방이 생겼고, 중학생이 되어 친척 언니가 쓰던 철제 책상을 물려받았다. 국어 교과서에 나온 수필을 보고 내 책상 종류를 알게 되었다.

  나는 후회한다. 너에게 포마이커 책상을 사 준 것을 지금 후회하고 있다. 그냥 나무 책상을 사 주었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다. 어렸을 적에 내가 쓰던 책상은 참나무로 만든 거친 것이었다. 심심할 때, 어려운 숙제가 풀리지 않을 때, 그리고 바깥에서 비가 내리고 있을 때, 나는 그 참나무 책상을 길들이기 위해서 마른 걸레질을 했다.            - <삶의 광택>, 이어령


먼저 사용하던 책상도 문지를수록 손때가 묻어 고풍스러워지는 참나무 책상은 아니고 합판에 필름지를 붙인 것이었다. 포마이커는 튼튼한 대신 온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이 차갑기만 해서 정이 붙지 않았다. 그런 종류는 원래 그런 건지 낡은 이유인지 서랍들이 매끄럽게 열리고 닫히지 않았다. 깊이가 깊은 맨 아래칸 서랍은 밀어 넣을 때마다 사춘기의 불협화음처럼 거슬리는 소리를 내고는 했다.

그 안에는 성적표, 일기장, 받은 또는 보내지 못한 편지들, 좋아하는 곡을 골라 녹음한 카세트테이프 등 좋아하는 것과 꺼내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얼마 안 가 또 친척에게 물려받은 침대가 들어오며 내방은 색과 소재가 각기 다른 가구들로 얼추 구색이 맞춰졌다.




그 이후로 여러 책상이 나를 스쳐갔다. 둘째가 생기고 서재로 사용하던 방을 놀이방으로 꾸미며 처음으로 책상이 없어졌다. 대신 첫째 공부도 봐주고 남편과 내가 책상처럼 사용할 수 있는 6인용 원목 식탁을 마련했다. 여러 용도로 사용할 것이고 가족들이 가장 오랜 시간 머물 가구라 여러 날 발품을 팔아 물건을 골랐다. 실제로 지난 5년여 우리 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는 식탁이라 할 수 있었다.


지난 생일에 어떤 선물을 받고 싶냐는 남편의 물음에 머뭇거리며 책상이라 답했다. 가방이나 액세서리 등을 염두에 뒀던 남편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다음날 가구를 보러 가자고 나를 이끌었다. 굳이 책상이 있어야 되냐고 물었다면 사실 할 말이 없었다.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식탁 위의 밥 먹은 흔적을 치우고 그 자리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데 어려움이 없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앉아 있기 싫던 자리를 왜 이토록 갈구하게 되었나 생각해 보니 출퇴근하던 때가 떠올랐다. 고속도로를 타면 시간이 단축되지만 급한 일이 아니면 항상 15분 정도 더 소요되는 국도를 이용했다. 사시사철 바뀌는 바깥 풍경을 감상하는 재미도 있었고 음악이나 팟캐스트, 오디오북을 들으며 단절된 나만의 세상에 머무는 한 시간은 힐링이었다. 4년 전 일을 그만두고 내 차도 아이들 학원 라이딩 용도로 쓰이면서 20분 이상은 운행할 일이 없어졌다.


나만의 무엇에 대한 소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꺼내볼 일 없는 옷장 속 정장들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들게 한다. 버리지 못하는 욕망을 이해해 준 남편과 엄마 책상이라니 어지럽히지 않는 아이들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비록 천지사방 다 뚫려있는 한 평 남짓한 공간에 장난감으로 포위되어 있을지라도 여기 앉아 있는 이 순간은 정말 소중하다.

엄마의 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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