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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우 Dec 16. 2022

너에게 건네고 싶은 말

절친이란


딸을 학원에 데려다주는 길에 커피를 사려고 드라이브 스루로 진입했다. 마침 쿠폰이 있어 선생님 것도 사서 아이 편에 들려 보낼 생각이었다. 앞차와 적당히 간격을 유지하며 왼쪽 통유리의 커피숍 내부를 힐끗 바라봤다. 북적이지도 한산하지도 않은 모습을 무심히 둘러보다 텀블러를 고르는 사람 하나에 시선이 멈췄다. 긴 생머리에 후드티를 입은 뒷모습이 낯익었다. 컵을 들고 유심히 들여다보는 몸짓을 보니 틀림없었다.



이미 주문해야 하는 순서인데 픽업한 다음에 주차를 할까, 만나면 무슨 말을 하지, 학원 시간에 늦겠는데 하며 머뭇대는 사이 아무거나 똑같은 커피 두 잔을 싣고 출구로 나와 버리고 말았다.




대학에 입학해서 처음 사귄 친구였다. 수런거림으로 가득한 학생 식당에서 식판을 들고 두리번거리는데 한 아이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이런저런 자기소개를 하다 며칠 전 가입한 동아리에 대해 듣게 되었다. 꽉 짜인 고등학교를 벗어나 대학 생활을 하자니 설렘인지 불안인지 붕 뜬 기분이었다. 어디에든 소속되고 친한 사람을 만들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 친구를 따라 동아리방에 가서 선배의 설명을 건성으로 듣고 봉사 동아리에 가입했다. 다음 학기부터는 교양 과목도 둘이 맞춰 시간표를 짰다.



친구는 야무지게 팔짱을 끼고 시골쥐처럼 쭈뼛거리는 나를 이끌었다. 지겨운 학식 대신 학교 밖 식당에 참치김치찌개를 먹으러 가자거나 새로 개봉한 영화를 보러 서울극장에 가자고 먼저 말해 주었다. 여러 가지 튀김 안주가 무척 저렴했던 단체 손님 가득한 대학로의 어느 지하주점에서 선배를 졸라 미팅 약속을 잡고 나를 부른 것도 그 친구였다.



여러 미팅 끝에 만난 타대학 학생과 열렬히 연애를 하게 된 친구는 남자 친구가 입대하던 날 펑펑 울었다. 슬픔에 빠진 커플은 번갈아 전화해서는 ‘보고 싶으면 어쩌냐', '내가 없는 동안 잘 부탁한다’등의 말들을 술주정처럼 늘어놓았다. 둘은 제대를 앞두고 헤어졌고 그 후로 친구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며 동아리 생활(친구는 중간에 탈퇴했다)에 연애까지 하느라 나의 대학 생활은 빽빽했다. 3학년 때 시작한 아르바이트가 직업이 되어 학원 강사를 하게 되었고 회계학과였던 친구는 CPA 시험 준비에 여력이 없었다. 졸업하고 나서는 몇 번의 실패 후 일반 회사에 취직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내가 일과 가정으로 정신없는 30대를 보내는 동안 친구의 30대는 그에 비해 단조로웠다. 입사와 퇴사의 간격이 점점 좁혀지더니 집에서 지내는 날들이 많아졌다. 같이 시험공부를 하던 친구나 전 직장의 동료들과의 만남도 줄고 친구라고는 나만 만나는 모양이었다. 대학 때 자주 만나던 장소로 약속을 잡기도 했지만 수입이 없는 친구가 부담스러울까 봐 수업이 없는 날은 주로 집으로 초대했다.



어느 순간부터 한동안 연락이 뜸하면 친구가 먼저 문자를 보냈다. 나는 일하거나 혹은 그다지 바쁘지 않은 상황에서도 회신을 잊곤 했는데 이튿날 답문을 보낸 적도 많았다. 부모님과 싸우고 독립하겠다며 내가 사는 지역으로 거처를 정했을 때에도 사실 반갑지 않았다. 임신으로 부른 배를 안고 같이 부동산을 도는데 가벼운 한숨이 계속 나왔다.



한동안 집에서 지내던 친구는 보육교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처음 들어간 어린이집에서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나오게 됐다. 친구가 영원히 집에 머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기저기 아는 사람을 통해 보육교사 자리를 문의했다. 다른 친구의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연락처를 건네니 친구는 여러 이유를 들어 면접을 주저했다. 시도조차 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처음으로 꾹꾹 눌러 담은 쓴소리를 카톡에 남겼다. 한참 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면접을 볼 수 없는 좀 더 상세한 이유가 담긴 답신이 왔다. 그 후 친구는 더 이상 먼저 연락하지 않았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너처럼 살면 얼마나 좋으냐는 친구 부모님의 말씀이 질책처럼 꽂혀 나를 움츠리게 했다. 진정 친구를 위한다면 일찍이 뭔가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힘들지 않은 일은 없다고. 악착같이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물려받을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닌데 노후가 걱정되지 않냐고.

입에서 맴도는 말을 해버리고 나면 돌아올 친구의 표정과 마음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매번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오는 것이 버거워 친구와의 만남을 미룬 적도 많았다.

  



몇 년 뒤 친구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상처를 줘 미안하다고. 나를 원망하냐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답문이 왔다.

항상 고마웠다고. 넌 내게 가장 소중한 친구라고.


     

매년 연말이 다가오면 올해는 넘기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망설인다.


그동안 나는 둘째를 낳았어.

몇 년 전에는 아예 일을 그만뒀고.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하루가 다 가지만 좋아하는 일을 해보려 해.

넌 어떻게 지내고 있니?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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