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결같은 빗속에 서서 젖는 나무를 보며
눈부신 햇빛과 개인 하늘을 나는 잊었소
누구 하나 나를 찾지도 기다리지도 않소
한결같은 망각 속에 나는 움직이지 않아도 좋소
나는 소리쳐 부르지 않아도 좋소
시작도 끝도 없는 나의 침묵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오
무서운 것이 내게는 없소
누구에게 감사받을 생각 없이
나는 나에게 황홀을 느낄 뿐이오
나는 하늘을 찌를 때까지 자랄려고 하오
무성한 가지와 그늘을 펼려하오
-김광석, 나무
김광석 형의 ‘나무’가 문득 생각나는 요즘이다. 겨울이 오는 길목에서 마주하는 벌거벗은 나무들 때문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 보다 스무 몇 살 땐가 처음 들었을 때 그때 생각이 나서인가 싶다. 노랫말처럼 ‘나무’처럼 살겠다고 생각했던 듯싶다.
그렇게 ‘나무’처럼 고고高高한 듯 숭고한 듯 심심深深한 듯 살아야 하나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어떤 이유에서 그런 삶을 살려고 했던 지금 어떠한가는 물음이 더 중해 보인다. 돌이켜보면 ‘나무’처럼 산 것도 같고 그렇지 못한 것도 같다.
한결같은 빗속에 서서 젖기 보다 눈부신 햇빛과 개인 하늘을 잊지 못했고, 누구 하나라도 먼저 찾아 나섰고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한결같은 망각 보다 기억 속에서 부지런히 움직였고 나는 소리쳐 부르기를 좋아했고, 시작도 끝도 없는 나의 침묵은 누구에게나 건드려졌다.
무서운 것이 내게는 없는 건 맞고 누구에게 감사받을 생각 없이 나는 나에게 황홀을 느낄 뿐인 것도 맞다. 나는 하늘을 찌를 때까지 자랄려고 하는 것도 맞고 무성한 가지와 그늘을 펼려하는 것도 맞다.
여전히 나는 ‘나무’의 삶을 동경하는 듯하다. 어쩌면, 삶의 모양이 복합적이고 삶의 방향 또한 가변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동경’하는 삶 하나 갖고 있다는 것이 중해보이기도 한다. 꼭 그렇게 살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삶이 복합적이고 가변적이라서 동경하는 삶이 필요하다면, 또한 같은 이유에서 동경하는 삶이 하나뿐이어야 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나무만 아니라 꽃이, 바다가, 숲이, 바람이, 별이, 달이, 우주 그 자체이면서 우주를 창작하는 ‘사람’이, 그 모두가 동경의 대상일 수 있을 듯 싶다.
2025. 11.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