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욜란다

2013년 3월 '파나마시티'에서

by 영진

짧지만 강렬했던 만남.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에서 만난 브라질 친구 마뉴엘과의 만남은 짧았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어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렇다.


강렬함의 근거는 ‘공간과 생각’이라고 여긴다. 그를 만났던, 그와 연관된 공간들인 ‘로사리오’와 그곳의 ‘호스텔’과 그 근처에 있던 ‘기억 박물관’이라는 공간의 좋은 느낌이 몸 어딘가에 흔적으로 남은 때문일 것이다.


경제나 정치 문제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여러 생각들에 공감대가 형성되어 이야기가 잘 통했던 때문이기도 하다. 넉넉해서 편안했던 그에 대한 기억은 ‘공간과 생각’ 때문이라고 여긴다. 물론, 며칠 밥을 같이 지어먹었던 것도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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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뉴엘만큼이나 그 만남이 강렬했던 ‘욜란다’. 그 만남부터가 극적(?)이었다.


콜롬비아 보고타를 출발하여 아르헨티나 이과수에 이른 것이 여행 4개월째. 중미로, 중미의 첫 도시인 파나마시티로 어떻게 넘어갈까 고민하다 비행기보다 버스를 선택했던 것. 장거리 버스 여행에 재미를 붙인 것, 아니, 버스 여행에 적응하여 편해진 몸이 원했던 것이다.


다시, 페루 리마, 에콰도르 키토를 거슬러 올라 콜롬비아의 최북단 카르타헤나까지 간 것은 그곳에서 요트를 타고 중간에 섬에서 쉬기도 하면서 파나마로 넘어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때문이다.


아, 근데 하필 휴가철이 걸러버려 요트에 남는 자리가 없단다. 일주일은 기다려야 하고 그때도 자리가 있을지는 미지수인 상황이 되어버린. 그야말로, 헐. 그래서 투르보라는 도시에서 통통배를 타고 국경 섬을 거쳐 파나마시티로 가기로 했다.


바로 그 국경 섬에서 파나마시티로 가기 위해 통통배를 기다리던 선착장에서 만난 두 친구가 스페인에서 온 이수시아와 콜롬비아 출신의 욜란다였다. 이수시아는 남미의 최남단에서부터 자전거로 1년이 걸려 남미 여행을 마치고 중미로 넘어가는 길이었고, 욜란다는 파나마시티에 있는 친구들에게 휴가를 가는 길이었다.


셋이서 통통배를 타고 중간중간 원주민들이 사는 섬에서 2박을 하고 마침내 파나마시티에 도착하여 이수시아와 헤어진 나는 욜란다의 친구네에서 며칠을 묵게 되었다. 욜란다의 프랑스 남자친구, 욜란다의 콜롬비아 친구와 그녀의 남자친구와 함께 보낸 일주일이 강렬한 인상으로 남은 것이다. 물론, 그 중심에는 욜란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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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이면서 페미니스트이면서 그와 관련한 글들을 쓰면서 언론사에서 일하던 친구와 잡지 발행을 준비 중이라던, 내게도 아시아 쪽을 담당하라던 욜란다와 그 친구들의 삶은 나에게 너무나 건강해 보였다. 그들과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지만 여행 일정 때문에 그러지 못한 것이 가끔 그때를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는다.


다시 중남미로 갈 기회가 된다면, 에콰도르 키토와 함께 파나마시티는 빠지지 않을 것 같다. 그들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 장소가 그리운 것이다. 10년이나 지난 지금 그들의 모습이 궁금하기도 하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 사 줄게' 언젠가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가 욜란다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답례를 하겠다고 했던 말, 그에 되돌아온 욜란다의 대답은 '내 인생을 사줘'라는 것이었다. 농담 반, 진담 반의 그들만의 문학적인 화법이었다. '진담 반'의 의미는 경제적으로 그들의 삶도 팍팍하다는 것이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걱정하던 그들이었지만 그들에겐 ‘문학’과 ‘예술’과 ‘언론매체’라는 삶의 여유와 무기가 있었고, 그런 그들로 인해 1주일이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참으로 넉넉했던 시간이었다. 그때의 기록들과 사진들을 분실해 버려 아쉬운.


2023.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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