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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안 Sep 19. 2023

유리잔 안의 찻잎처럼

초가을 편지


  한참을 돌아가는 길을 걷다 문득 편지를 씁니다. 안부를 물어야겠지요, 얼굴마저도 흐릿한 당신이지만 오늘은 왠지 당신이 안부를 묻지 않아도 좋을 만큼 잘 지내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듭니다.


저는 꽤나 얼얼한 하루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마음처럼 차가워지지 않는 날씨의 탓인지, 밥을 먹다가도 글을 쓰다가도 종종 먹먹해지는 마음과 흐릿하게 손목을 잡는 기억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밖의 하늘을 보게 합니다. 요즘 하늘은 또 왜이리 높고 맑은지요, 그림처럼 피어오르는 구름을 보고 있으면 한 번씩 그 먹먹하고 얼얼한 마음을 아, 하고 잊어버릴 수도 있게 됩니다.


  종종 발견하는 조각 같은 사랑들이 요즘은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끼 먹은 식사보다도 훨씬 오래 걸린다는 사랑의 끝이 내 안에서는 소화가 되고 있는 것인지, 입추 지나 처서 지나 온다고만 하는 가을은 언제쯤 완연해질지. 모르는 것투성이인 삶을 지나며 요즘은 그렇게, 그럭저럭 살고 있습니다.


  티백을 빠져나온 작은 찻잎같은 마음들이 요즘에는 목끝에 자주 걸리는 듯합니다. 이것은 여름 끝에 걸려있는 시간의 탓인지, 미움을 지나면서도 여름을 완전히 사랑하지 못한 나의 탓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무엇의 탓도 아닌데, 저만 혼자 유리잔 안의 찻잎처럼 가라앉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쭙잖은 사랑을 씁니다. 마음이 어지러웠던 지난 며칠간 그랬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지나면 지날수록 알 수 없게 되니, 사랑이나 사랑하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들은 시간을 따라 조금씩 어수룩해지는 것이 자연스러울까요. 지나며 흐려지지만 결국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는 일과 같은 종류의 평연이라고 생각하면 이 또한 서글프기만 합니다.


  이 편지는 어쩌면 넋두리나 기도에 가깝습니다. 어서 가을 지나 겨울이 오길 바라는 마음, 흐려지는 사랑이 더욱 흐려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쓰기 때문입니다. 잦아드는 생활을 바라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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