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기수
살면서 만났던 가장 무서운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코 이 사람을 들겠다. 법과 원칙, 사회적 규범. 어느 것도 통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흔들어 대는 주먹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남은 카드는 돈뿐이었다.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면 조금 움직였다.
얼마나 무서우면 북해의 거친 바람과 성난 파도라고 했을까?
사춘기를 앓는 소년 소녀만큼 무서운 사람이 없다. 대부분 초등학교 5학년부터 시작하며, 빠른 아이들은 4학년 2학기면 벌써 증상이 나타나서 중2가 되면 절정에 달한다. 수십 년을 그들과 보냈기에 사춘기가 보내는 각종 신호를 안다. 코를 찌르는 성장 호르몬부터 조변석개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루에 열두 번을 두 번 더 변하는 몸과 마음의 변화를 그림 보는 것처럼 알 수 있다. 대처도 잘하냐고?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사춘기에 처방은 없다. 시간이 약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혜란이 누나가 사춘기였을 것이다. 포커페이스 중기 할아버지도 이겨 먹은 걸 보면 사춘기 맞다. 그날 밤 누나가 심심한 데다 사춘기 소녀의 감성이 골목으로 불러냈다. 사랑채에 중기 할아버지 코 고는 소리가 들리고, 방문 앞을 기웃거리던 당숙모의 발걸음이 멀어져 가고 조금 있다 대문을 나섰다. 마루 밑에 엎드려 있던 복실이 따라 나오는 것을 손사래 치며 쫓아 보냈다.
마을의 밤은 또 다른 세상을 만들었다. 고단한 농사일을 마친 어른들은 저녁을 먹고 굴다리 옆 정자로 모여들었다. 벌써 만길 아재와 송동 아재는 작은 꼬마전구를 불빛 삼아 장기판이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오늘은 싸움 없이 끝났으면 좋겠다. 맨날 만길 아재가 떼를 써서 장기판을 엎어 버린다. 그러면서 다음 날이면 또 마주 앉는 것을 보면 그것도 장기인지 모르겠다. 목침 베고 누워 자는 건지 아닌 건지 기척 없는 봉성 아재, 난간에 기대어 곰방대 빨고 있는 월정 할아버지. 농사 이야기며, 누구네 자식 인사성이 바르다는 이야기로 밤이슬이 내려앉을 때까지 도란거리다 일어나 어슬렁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같은 시각 아이들은 당산나무 아래 어둠 속으로 모여들었다. 영봉이 형을 호위하듯 둘러앉았다. 형의 무용담은 언제 들어도 흥미진진했다. 한번은 소 꼴을 베다 지나가는 옆 동네 여고 다니는 누나를 따라 그 동네까지 갔단다. 마을 어귀에 청년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맞짱을 떴는데, 전부 다 논두렁 아래로 꽂았다고 했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거짓말 같기도 하고 진짜 같기도 하다. 이상한 것은 형이 언제부터인가 윗마을 쪽 원등에서 소 꼴을 베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표정이 변하면 화제를 바꿨다. 아랫동네 기철이가 들판에 매어 놓은 염소 엉덩이를 붙잡고 쫓아다닌 것을 어른들이 보고 지게 작대기를 휘둘러 팼다고 한다. 기철이 산으로 도망가면서 어른들에게 주먹을 휘둘렀단다.
“야, 니들 담배가 어떤 맛인지 아냐? 쬐그만 놈들이 뭘 알겠냐?”
“자 봐라 이렇게 해서 침을 묻혀 말고 돌려준 다음에 이렇게 불을 붙이면…”
콜록콜록, 형의 기침 소리가 컸다.
“네 이놈들 거기서 뭐 하냐? 또 담배질이구나. 이놈들”
정자에서 숙천 아재가 소리쳤다.
밤이 남자들만의 세계였냐고? 그렇지 않다. 밤은 여자를 위해 존재했다. 너럭바위 아래는 여자들의 세계였다. 그곳은 여성 전용 야외 목욕탕이다. 바위 가까이는 할머니, 엄마들 자리였고, 끄트머리 쪽은 딸들 차지였다. 땀으로 얼룩진 몸을 물속에 담그고 정자의 남자들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며 하루를 마감했다. 어느날 밤 공판장네 아들 홍수가 손전등을 품고 너럭바위로 접근했다. 등 뒤로 꼬맹이들이 낮은 포복으로 따라붙었다. 별안간 켜진 후레쉬 불빛에 홍수 형 엄마 가슴이 드러났다. 누나들 장소로 여겼는데…. 홍수 엄마도 그렇다. 몸빼바지만 꿰입고 쫓아 왔는데, 거의 다 잡아 목덜미를 채기 직전에 걸음을 멈추었단다. 어쩌면 엄마의 본능으로 홍수형인 것을 알았을 것이다. 잡힐뻔한 형은 후레쉬가 물 속으로 날아갔고, 그날 밤 영봉이네 쇠죽 방에서 자고 들어갔단다.
누나는 그 바위에 가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곱디고운 누나가 그 밤에 나올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