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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로 정했다! -3화

선생님 앞에선 모두가 아이다.

by 하다


선생님! 나 서운해!!!


수영을 끝내고 나와도 더 이상 너구리가 되지 않을 때쯤 있었던 일이다.

우리 초급반에는 다양한 연령대가 공존한다.

세대로 치자면 3대가 함께 수영을 배우고 있는 거다.

20대 초반, 30대 후반, 40대 초반, 50대, 70대까지!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정이 많으신 70대 할머니다.

정만큼 말도 많아서 일일이 맞장구 처 주다 보면 살짝 지치기도 하지만,

하루 종일 함께 있는 것도 아니니 그저 "아하하하하하~ 그러시구나~"해 드린다.

말끝마다 "그랬쥐잉~"(전라도 말투) 하셔서 앞으로 쥐잉 할머니라 부르기로 했다.



쥐잉 할머니가 처음 나를 보고 우리 손녀뻘 되겠다며 "20 대지?"하고 묻는 바람에

나는 놀라고 민망해서 하마터면 물 위로 솟구칠 뻔했다.

나는 매우 염치 있고 자기 객관화가 썩 잘 된 인간이다.

그런데 그런 민망함이 쓸데없는 감정소비였음을 얼마 안 가 알게 됐다.

쥐잉 할머니는 조금 젊은 회원만 보면 같은 멘트를 날리셨다.


"쟈기야~ 쟈기 20대쥐잉~?"

알고 보니 멘트 장인이셨다는.......



쥐잉 할머니는 그중에서 거의 제일 오랜 회원이지만 (고인물 총무님을 제외한)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시다 보니 1번은 언감생심, 발차기 순서는 새파란 초짜에게도 내어줘야 했다.

그래도 왕선 밴데 좀 봐줄 법도 하건만, 우리 호랭이 선생님은 얄짤없이

"자리 바꿔~!"하고 쥐잉 할머니를 자꾸자꾸 뒤로 보냈다.

그때마다 눈과 입이 따로 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뒤로 가던

쥐잉 할머니가 어쩐지 나는 조금 불안해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선생님이 한 회원에게 조금만 오래 머물며 자세를 고쳐주면

"아유 쩌기는 좋겠어~ 완전~히 일대일로 봐줘브네잉~"

하며 역시 그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어딘지 모르게 위태위태하던 쥐잉 할머니가

드디어 폭발했다!



우리 레인의 에이스 1번 2번 회원 두 분이 초급과 중급 사이 반 레인으로 올라갔는데

쥐잉 할머니는 나보다도 더 뒤에서 발차기를 하게 된 거다.



'얼굴은 울그락붉그락, 입은 삐쭉빼쭉, 코는 실룩실룩'

영락없이 친구한테 삐친 어린아이 같았다.


그러더니, 쥐잉 할머니는 선생님에게

"선생님! 너무 한 거 아녀? 나 서운해!"하고 폭탄을 던졌다.



분명 가을이었지만, 그 냉기는 시베리아 벌판을 능가했다.

우리 호랑이 선생님은 말을 세게 뱉을 줄만 알았지,

나긋나긋 어를 줄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니 뭐가 너무해~~~"

"아니 저기보다 내가 먼저 시작했는디 쩌기는 올려 보내고 나는 왜 안 보내줘요잉?"

"아니 그게 무슨..."

"아니 글잖애~~~ 나도 오리발 차고 싶은디~"

"아니~ 자기한테 맞춰서 가야지 ~"

"아니 나는 자세도 봐주지도 않고잉, 다른 사람은 오래 봐주면서잉! 진짜 기분 나빠서!"


그 말을 남기고 물속에서 쑥 빠져나가 버렸다.

쥐잉 할머니의 서운함도 이해가 갔지만, 나는 선생님의 난감한 처지가 조금 더 걱정스러웠다.

어쩔 줄 몰라하던 우리는 물에 빠지지 않고 중간에 서지 않고 나아가는데 집중하느라

금세 쥐잉 할머니 일을 잊었다.



그리고 다음 시간,

다신 오지 않을 것처럼 떠났던 쥐잉 할머니는

매일 서있던 그 자리에서 헤헤 실실 웃고 계셨다.



나는 내심 안도했다.

70을 넘기고도 그렇게 귀여울 수 있는 쥐잉 할머니가 그날따라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전화위복이라더니.

그 뒤로 쥐잉 할머니는 우리 호랭이 선생님의 열혈팬이 되었다는 이야기!

우리가 모르는 둘 만의 뒷 이야기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누가 먼저 사과했을까?'

'선생님이 전화해서 그 우렁찬 목소리로 얼러 주셨을까?'

'쥐잉 할머니가 전화해서 그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사과하셨을까?'




뭐가 됐든,

지금도 쥐잉 할머니는 누군가를 조금씩 질투하며

누군가를 진심으로 예뻐하다가

또 누군가를 살짝 얄미워하며

성실하게 수영장에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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