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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4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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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비 스케치북 Mar 10. 2019

오드리 햅번처럼

영화 '은교'

                                                                                                                           

그날의 모델은'젊지 않은 여자 '였다. 나는 이 말을 찾아내느라 여러 번을 다시 썼다.

'나이 먹은 여자'는  처량했고 '중년 여인'은 너무 무거웠다. 요즘 누드모델은 20~30대가 대부분이다. 남 앞에서 '옷을 벗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젊은 그들이  당당하게 누드모델임을 밝히고 옷을 벗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덕분에 나는 요즘 젊은 남녀의 벗은 몸을 자주 본다. 그러다 가끔 젊지 않은 모델을 그리게 된다. 뱃살도 울룩불룩하고 살집도 있지만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서는 그게 더 좋기도 하다. 젊지 않은 그 여자 모델은 몸이 이쁘지 않았다. 뱃살은 세 겹 정도 접혔고 젖꼭지는 목보다는 배꼽에 더 가깝게 있었다. 메이크업은 하지 않았고 헤어스타일은 신경 쓴 거  같지 않았다. 

살은 탄력이 없어 보이고 시장에 가면 옆을 수 없이 스쳐 지나가도 기억나지 않을 거 같은 여자였다.

한때는 글래머로 시선을 끌었을 거 같았지만 아무리 육감적인 몸매도 세월은 그대로 두지 않은 듯 했다.


나는 그녀를 보면서 문득.. 영화 '은교'가 생각났다. 어느 초여름...老교수는 자신의 정원에 무단 침입해 파라솔 의자에 잠들어 있는 젊은 은교를 보게 된다. 민소매 티셔츠와 팬티 같은 짧은 바지만 걸쳐서 몸의 대부분이 드러나도 민망하기는커녕 이쁘기만 한 단발머리 여고생.

그날 밤 노교수는 전신 거울 앞에서 자신의 벗은 몸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늙어버린... 이미 젊지 않은 남자의 벗은 몸. 그날부터 노교수는 힘든 싸움을 한다. 나는 영화의 초반부에 나이 들어도 멋있는 배우가 많이 있는데 저렇게 고운 박해일에게 굳이 늙은 분장을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유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노교수의 책상 위에는 젊은 시절의 사진 액자가 있다. 젊은 박해일의 사진이다. 노교수는 눈을 감는다.

사진 속의 젊은 남자는 은교와 풀밭을 뛰어다니고 키스를 하고 포옹을 하고 사랑을 나눈다. 노교수는 끝까지 은교의 몸에 손을 대지 않는다. 다만 교수는 사진 속의 젊은이만이 은교와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나름의 잠금장치를 하고 자존심을 지키며 은교를 갖는다.

노교수는 거울 속의 벗은 몸과 은교를 만나게 할 자신이 없었던 걸까. 아니면 그렇게  추한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을까.  알 수 없지만 관객으로서는 다행스러웠다.  

                                  





                                                                                                                                                                                                                                                                                                                                                        ' 이미 젊지 않은' '나이 먹은' '중년의' 그녀에게 어울리는 조심스러운 수식어들은 다 내 것이었다.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아름다운 눈을 가진 오드리 햅번처럼, 늙어서도 웃는 눈이 귀엽고  이쁜 할머니가 되는 법을 연구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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