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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ebangchon Mar 11. 2019

"오늘 뭐 했어?" 그 곤란한 질문

질문보다 더 곤란한 대답

남편이 퇴근하고 오자마자 묻는다. How was your day? (오늘 하루 어땠어?) 

직장인일 때는 "Crazy"(미친 하루였어), "Not too crazy"(미쳤지만 참을만한 하루였어), "Just OK"(미칠 일은 없이 무난했어)로 답했다. 보통 나를 미치게 하는 업무, 사람들이 직장에는 존재하고 그들은 나를 괴롭히려고 있었다. 그 대가로 나는 월급을 받는 거였으니깐. 직장인일 때 'Crazy'의 강도로 하루가 어땠는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었다면, 직장인이 아닌 지금은 보통 "Good"의 강도로 표현이 된다. 


문제는 남편의 그다음 질문에 있다. "What did you do, today? (오늘 뭐했어?)

직장인일 때는 남편이 굳이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회의, 미팅, 이메일, 전화 등으로 주어진 업무를 했을 테고 소소히 동료들과 점심시간, 커피 타임에 수다를 떨었을 테니까. 직장만 다니다가 직장을 다니지 않게 된 아내에 대한 걱정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궁금증이기도 할 터. 질문하는 사람의 마음은 알겠는데 답을 해야 하는 사람인 나는 상당히 난처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렇게 답하곤 했다. 

남편이 의아해하며 다시 묻는다.

"아무것도 안 했다고?"

내가 다시 답한다. 

"응, 아침에 자기 아침 준비하고 치우고, 침대 정리하고, 스트레칭하고, 샤워하고, 아침 준비해서 먹고, 팟캐스트로 아침 뉴스 들으면서 설거지하고, 책 읽고, 빨래 돌려놓고 주식이랑 부동산 뉴스 좀 보고, 블로그에 지난 여행 기록 정리 조금 하고, 한국 친구랑 톡 좀 하다가, 장 보러 마트 다녀왔어."

남편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다시 말한다. 

"그런데도 아.무.것.도.안.했.다.고? 아무것도 안 하지 않았잖아. 왜 아무것도 안 했다고 말해? 그 많은 것 하느라 힘들었겠다." 

나는 다시 생각한다. 

내 스스로가 '했다고 쳐 줄' 그 일은 어디에 있는 무엇이냐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일'로 압축되는 '내가 한 무엇'에 대한 정의를 되짚고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그동안 살면서 해 온 것은 '공부' 혹은 '일'이었다. 두 가지는 고생스러운 것이거나 돈을 벌어다 주는 것, 혹은 그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메인이고 나머지는 '그 외'의 것이었을 뿐. 문제는 지금 내가 열거한 일과는 내게 고생스럽지도 않고, 돈을 벌어다 주지도 않는다는 데에 있다. 직접적으로 돈을 벌어다 주면서 고생까지 첨가된 것. 그것이 바로 내가 했다고 떳떳이 말할 수 있는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근데 진짜 그럴까? 그게 진짜 내 생각이라면 직장인일 때의 나는 가치 있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어야 했다. 아니었다. 막상 그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일을 할 때(직장인일 때)는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이렇게 살다가 죽는 건지, 매일매일 의문을 가지다 질려가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분명한 것은, 벌거나 고생하려고 우리가 사는 건 아니라는 거다. 결국은 돈과 고생, 그게 주요한 것처럼 보였으나 그게 아니란 소리다. 

  



퇴사하고 약 오 개월에 걸쳐 이 난처한 상황과 복잡한 생각은 반복됐다. 남편이 퇴근 후 매일 물을 때마다 매일매일 당혹스러웠고, 나는 하루 일과를 시간순으로 나열해 왔다. 그러다 언젠가부터는 '아무것도 안 했다'고는 말하지 않게 되었다. 얼마 전부터는 시간의 흐름 순이 아니라 내가 주요하게 생각하거나 재미있게 생각한 것부터 말할 줄도 알게 되었다. 


얼마 전 내가 이 생각의 도돌임표에서 알아낸 것은, 내가 하는 많은 것들 중 '메인'과 '부수적인 것'의 구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꾸준히 지속적으로 정성을 들여서 할 일이 없다면 만들어야 하고, 있다면 그 많은 것 중 한 가지를 정해야 했다. 그래서 직장 다닐 때 하겠다고, 혹은 하고 싶다고 백 번 천 번 마음만 먹고 한 번을 하지 않았던 '글쓰기'를 내 메인 일로 정했다. 이건 누가 정해주는 게 아니다. 직장인이 아닌 나는 모든 것을 내가 내 기준에 따라 정해야 하고 정하면 그게 다다. 누가 수정하라고 부족하다고 채근하지 않으니깐. 


네이버 블로그에는 여행 다녀온 기록을 남기고, 브런치에는 퇴사 후의 나의 일상과 해외생활을 기록한다. 그것을 나의 메인 일로 정하고 나니 하루가 더 풍족해졌고 일과는 더욱 계획성을 가지게 되었다. 아침에 남편이 출근한 이후에 뭘 해야 하지? 하면서 닥치는 대로 보이는 것부터 하던 바쁜 일상과는 달라졌다. 퇴사하고 반년만에. 




직장 다닐 때 숱하게 생각하고 말했고, 지금도 어떤 직장인은 말하고 있을 것이다. '여건이 되어서 회사를 관두면 매일매일 재미있게 놀 거야.'라고. 하지만 육아라는 더 큰 고생을 계획하고 있지 않은 나 같은 직장인, 부인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뼛속까지 한국인'인 사람이라면 나와 마찬가지로 저 지난한 과정과 생각의 굴레를 거칠 게 분명하다. 그 속에서 내 안의 강박과 마주치고 많은 시행착오를 거칠 것이다. 다행히도 그 과정을 통해 내가 꾸리는 일상과 일과가 생겨나고 그 안에서 편안해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 브런치에 글을 쓰고, 글을 더 잘 쓰기 위해 잘 쓰인 칼럼을 찾아 읽는다. 블로그나 브런치에 쓸 다음 글의 소재를 구상하고 개요도 짠다. 그것이 잘 된 날에는 기분 좋게 카페에 나가 커피도 한 잔 사 마신다. 그것이 잘 안 된 날에는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결국 오늘 메인 일을 종료한다. 그리고 다른 것들을 하다가 다시 쓰고 싶은 말이나 문장이 생겨나면 다시 차분히 글을 쓰기도 하고 어떤 날엔 과감히 패스하기도 한다. 그리고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슬그머니 다른 것으로 바꿔치기도 하는 요령도 부린다. 


직장인이 입사해 직장인의 모습을 가지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옆자리의 사수나 동기가 적응을 도와준다. 마찬가지로 직장인이 아니게 되면 직장인이 아닌 모습과 생활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다만 옆자리에 앉아 도와줄 사수나 동기는 없다. 사수나 동기가 필요하면 내가 찾아 나서야 한다. "무엇을 했냐?"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내 일과를 스스로 만들고 일정을 조정하며 일상에 대해 자체적으로 인정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아무도 고과를 평가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나의 삶의 모습을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 내가 꾸리는 하루는 그런 모습이 된다. 


'직장인 아님'에도 적응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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