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시 세끼 먹다가 하루가 다 간다
직장인의 일상 중에 꼭 하나, 절대 빼먹지 않고 하게 되는 것이 '점심 먹기'다. 출근하자마자부터 점심기간이 기다려지고, 점심시간이 끝나 사무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집으로 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팀점이 있는 날엔 오전부터 팀 메신저가 바쁘다. 오늘 점심 뭐 먹을까, 예약을 할까, 거기 메뉴는 별로지 않느냐, 새로 오픈한 식당이 있다던데... 퇴근 전까지 공식적으로 외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간 중 하나이기도 하고, 서둘러 아침 출근하느라 걸렀거나 간편식으로 먹은 아침, 야근이나 다른 약속, 취미나 자기계발 등으로 저녁 시간까지 대체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직장인들의 점심시간과 점심식사는 더욱더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주부가 되고, 집에 있는 '집 사람'으로 생활하다 보니 막상 제일 간과되는 것이 점심이다. 직장인일 때는 혹은 직장인인 사람들은 오히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집에 있으면 점심시간이 자유로워서 오히려 먹고 싶을 때 자유롭게 먹고, 정해진 1시간 내에 끝내지 않아도 되는 거 아냐?"라고. 그 말은 맞다.
하지만 자유로워진 점심시간은 자칫하면 놓쳐지거나 의도적으로 생략되기가 무척 쉬워졌다. 특히 홀로 사는 세대가 아닌 남편이나 아이가 있는 가족 구성 세대라면 더욱 그렇다. 점심시간은 자유로울지언정 아침과 저녁 시간은 어느 정도 가족의 스케줄에 따라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자유는 자유인데 처음부터 끝까지는 아닌 자유여서 혼자만의 시간에 주어지는 점심시간은 애매해지거나 성가시고 거추장스러워지기 일수다.
주부가 되고 나서도 여전히 직장인 생활이 더욱 익숙한 나여서 더욱 그럴 수도 있다. 직장인에게도 적응 시기가 필요하듯, 주부에게도 적응 시기는 필요하니 나는 주부의 점심시간과 점심식사에도 적응이 필요한 것 같다.
일찍 출근하는 남편의 아침을 꼭 챙긴다. 주부가 되면서 다짐한 것은 '아침을 거르지 않는다.'이다. 가족과 떨어져 서울에서 대학 다니고, 취직하여 회사 다니는 내내 챙기지 못했던 아침에 대한 고집이 있다. 그래서 새벽 일찍 출근하는 남편의 아침을 눈곱도 떼기 전에 먼저 챙겨 준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거나 라디오 뉴스를 들은 후 천천히 아침 식사를 한다. 출근을 해야 하고 아침을 먹는 남편이 있으니 아침 기상 시간 및 아침 식사 시간이 대략 정해져 있다는 이야기. 이와 마찬가지로 기상 시간 역시 대략 정해져 있으니 충분한 취침을 위해 취침시간도 대략 정해져 있고, 먹다가 곧장 잠자리에 들 순 없으니 당연히 저녁 먹을 시간도 대충 정해진다. 따라서 저녁을 안 먹을 작정이 아니라면 점심 먹을 시간도 정해지게 되는 것이다. 직장인일 때나 주부일 때나 마찬가지로 부부가 함께하는 식사는 평일의 경우 저녁이 유일하다. 그러므로 놓칠 수 없다.
게다가 자리에 앉아서 휴지 깔고 숟가락 젓가락만 놓으면 알아서 누가 메뉴를 내어놓지도 않으니, 점심 한 끼를 위해 생각하고 준비해야 할 것도 많아진다. 일단 점심 메뉴를 정하는 것, 그게 간단치가 않다. 먹고 싶은 메뉴는 나는 누가 물으면 3초 안에 늘 답할 수 있다. 식성이 좋고 늘 먹고 싶은 것도 구체적이며 의견을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는 스타일. 그래서 회사 다닐 때 점심시간이 되면 환영받았다. 우리 메뉴 좀 정해줘, 의뢰가 들어오기도 할 정도.
그런 나도 지금은 내 점심 메뉴를 정하는 게 너무나 어렵다. 일단 내가 만들 줄 아는 메뉴인지 아닌지, 그 메뉴를 위한 재료가 충분히 있는지, 부족한 재료를 사 와야 하는지, 아니라면 그 메뉴를 파는 식당에 가기 위해 외출을 해야 하는지 등 생각하고 정할 게 너무 많다. 그렇게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가다 보면 내가 가정한 점심시간이 이미 많이 지나가고, 그러다 보면 간단하게 컵라면이나 우유에 선식 등을 마셔 이미 소모된 점심시간을 대충 마무리하고 말게 되는 것이다.
메뉴가 정해졌다 해도, 직접 하기 위한 장보기 및 요리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되면 요리를 해볼까 싶다가도, 차라리 그 메뉴는 저녁 메뉴로 해서 남편과 같이 먹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 재료 다듬고 요리하는 시간까지 들여 나 혼자 점심 먹는 거보다 저녁에 남편과 같이 먹는 것이 투입 대비 산출, 즉 효율성이 커 보이기 때문이다.
'나만의 점심을 제대로 차려 보겠어!'라고 생각한 날에는 아침을 더 간단하게 먹는다. '위'에 공간을 더 주고 아침과 점심 사이의 시간을 조금 줄인다. 이럴 경우 아침을 먹고 치우고 돌아서자마자 점심 식사 준비가 시작된다. 이때도 집 사람은 집안일의 효율성을 위해 세탁기를 돌린다. (세탁기에 건조기까지 돌리면 점심 식사 후 점심 설거지 후에 빨래를 갤 시간이 맞아떨어진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점심을 먹던 중에 숟가락 내려두고 세탁기에서 꺼낸 빨래를 건조기로 옮겨야 한다.)
점심을 차려 먹고 나면 나 스스로에 대해 애정을 주고 정성을 준 것이 대견해지기도 한다. '그래 난 우리 부모님 세대와는 달라. 꼭 가족, 자식, 남편을 위해 희생하는 게 아니라 내 행복을 우위에 두고 혼자 먹는 밥상도 제대로 차려 먹을 줄 안다 이거야!' 설거지거리가 쌓여있는 개수대와 오늘 저녁엔 뭘 먹지 하는 고민이 연달아 떠오르기 전까지 그렇다. 마지막 숟갈의 음식을 입에 넣자마자 그것을 씹으면서 빈그릇을 개수대로 옮기고 입안의 마지막 밥풀 한알이 다 사라지기 전에 식탁 정리가 완료되는 것을 보면.
그래서 엄마들이 그렇게 아빠들의 전화에 저녁을 먹고 들어오는지 와서 먹을 건지를 묻는 거였을까. 차이가 있다면 엄마들은 점심도 대충 때우고 아빠들이 저녁을 밖에서 먹고 들어온다면 저녁도 대충 때울 가능성이 크다. 나는 점심을 잘 먹고 저녁을 또 준비하는 에너지를 쓰기 싫어서 저녁을 대충 때울 생각을 하거나 점심을 더 잘 챙겨 먹을 것 같지만. 하지만 칼퇴 및 가정생활을 중시하는 문화 속에서 우리 남편은 제때 퇴근해 집에 돌아온다. 남편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때가 가장 반가운 시간이기도 하다가, '오늘 저녁 뭐 먹지'의 고민이 시작되는 타이밍이기도 하다. 남편이 유달리 지쳐 보이는 날에는 점심때 에너지 좀 덜 쏟고 저녁에 쏟으면 좋았을걸... 싶은 생각도 든다.
뭐 해 먹고살지가 인생을 두고 하는 고민이라면, 오늘 저녁 뭐 먹지는 하루를 두고 하는 고민이다. 거기에 덧붙여 집에 있는 집 사람의 추가된 고민 하나는 오늘 점심 뭐 먹지 보다는 오늘 점심 먹을까 말까에 가깝다. 장기적인 관점의 고민(뭐 해 먹고살지), 나 하나보다 여럿이 얻는 혜택이 큰 효율적인 관점의 고민(오늘 저녁 뭐 먹지) 때문에 혼자서 먹거나 말거나 때우게 되는 점심에 대한 고민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치부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나 너무 뼛속까지 한국인인가?
'맛있고 빠른' 점심을 위해 국을 끓이기 시작했다. '한 끼에 한 요리' 하는 것이 원래의 스타일인데 국을 한번 양 많게 끓이면 밥 한 그릇만 있으면 점심이 뚝딱 해결이 되는 거다. 그래서 우리 엄마들은 그렇게나 곰국을 끓였던 건가. 엄마들의 지혜이자 요령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삼시세끼 먹고 치우다 하루가 다 갈 주부의 생활에 여유를 줄 지혜(feat. 곰국, 미역국, 김치찌개_끓이면 끓일수록 맛이 있어 짐), 무시되거나 간과되기 쉬운 주부의 점심을 챙겨줄 애정(feat. 남편 또는 옛 동료, 친구_점심시간에 주부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면 그 주부 친구는 점심시간임을 알게 됩니다.)이 필요하다.
오늘 점심 드셨어요? 뭐 드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