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질 때 비로소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
휴양지에서 라임 한쪽 끼워먹는 멕시코의 대표 맥주 말고는 별다른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던 이 단어는 전 세계적 감염병 대응체제로 살아온 지난 2년 사이에 듣기만 해도 답답하고 짜증, 화, 우울, 온갖 부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단어로 전락했다. 그러나 라틴어 어원상 왕관을 뜻하는 이 영어단어가 순우리말로는 빛무리, 즉 구름이 태양이나 달의 표면을 가릴 때 그 둘레에 생기는 빛의 테두리와 같은 뜻임을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약간의 노력만으로도 누릴 수 있었던 평온한 일상의 루틴과 소중한 취향들을 잃어버린 것은 분명 내 삶에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였다. 하지만 이 그림자 속에서 변함없이 중요한 것들의 존재감과, 어둡기 전에는 미처 몰랐던 것들의 귀함이 역설적으로 선명히 드러났다. 그림자를 둘러싼 밝은 빛의 테두리, 코로나처럼.
한 달에 두어 번 홀로 영화관에 가는 시간을 나는 지난 2년간 그 이전과 변함없이 지켜냈다. 상영관내 취식이 불가능한 상황과 철저한 띄어앉기를 고려했을 때 매일 출근하는 사무실보다 더 안전한 곳이라는 나름의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상영관에서 보내는 두 시간 남짓은 코로나 이전에 보냈던 시간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누구를 만나도 코로나 이야기를 해야 하고, 혼자만의 여행조차 맘대로 할 수 없지만 집에 갇혀있자니 재난처럼 느껴질 때, 전혀 다른 세상에 몰입하게 해 주는 영화는 휴식이자 치료였고, 잠시나마 '지금과는 다른' 과거와 미래에 있는 듯한 평온함을 주었다. 확진자가 정점을 찍고 영업제한 조치가 강화되었던 언젠가는 수백석 규모의 멀티플렉스 상영관에서 혼자 블록버스터 영화를 '소리 내어' 감상하면서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이런 시간과 공간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이었더라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로, 영화관의 존재는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 불가했다.
십수 년 살아온 아파트의 층간소음을 새삼스레 체험하는 재택근무를 통해 내게 침묵과 고요의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시끌벅적 웃고 떠드는 자리를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혼자 있을 때의 나는 시계 초침 소리조차 너무 시끄럽다고 여길 만큼 예민함이 도드라지는 사람이었고, 낮이고 밤이고 쿵쿵대는 윗집과의 불편한 대면을 피할 수 없었다. 밤 열 시가 넘어서면 아이들이 뛸 때 적어도 말려주셨으면 한다고, 낮이라 하더라도 집안에서 공을 튀기거나 기계식 운동기구를 돌리는 건 삼가 주셨으면 한다고, 몇 달이나 참고 있던 말을 편지로 써서 윗집 문에 붙이고 오던 날, 그간 남의 말로만 듣던 '정 없고 과민한 이웃'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하는 수 없었다. 이사를 갈 것이 아닌 다음에야 내가 사는 집을 편안한 일상 활동이 가능한 공간으로 만드는 게 우선순위였으니까. 깨어 집에 머무는 시간이 코로나 이전보다 다섯 배 이상으로 늘어난 지금에서야 나는 나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다. 집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고요하고 차분한 시간을 너무나 원하는 나를.
어두울 때만 분명해지는 그 빛무리 자체를 희망이라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어르신들 말씀에 달무리는 분명 다음 날 맑을 징조라고 했고, 일식과 월식도 잠시 잠깐 지나갈 뿐이다. 최근의 확진자 증가세는 연일 우상향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마음 졸이며 내 차례를 기다리는 지금이 어쩌면 이 긴 어두움의 끝일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작게나마 품어본다. 내 삶의 광환은 이미 질리게 본 것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