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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한 것과 이별하기

by 해이





완연한 가을이다. 나뭇잎의 색은 짙어지고, 공기에는 볕에 구워진 나무의 냄새가 섞여있다. 낮에는 부드러운 햇살이 비치지만 아침과 저녁에는 손이 시릴 만큼 공기가 차다. 가을은 그 기간이 참 짧다. 언제부터인가 계절의 균형이 흐트러져 긴 여름과 긴 겨울 사이, 단 며칠 남짓한 틈을 우리는 가을이라 부른다. 그래서일까, 요즘의 가을은 대부분의 이별을 닮아있다.


나는 올해 만 40이 된다. 11월 12일, 서른아홉의 마지막 날을 지나 마흔의 문턱에 선다. 숫자로 보면 평범한 날들 중 하나이지만 묘한 기분이 든다. 서른의 끝과 마흔의 시작 사이, 그 경계선 어딘가에서 나는 꽤나 오랜 기간 동안 품어온 단어 하나와 작별하려 한다.

"적당함."

그건 나를 보호해 온 말이자, 동시에 나를 갉아먹는 말이었다. 너무 뜨겁게 살면 쉬이 지치고, 너무 깊이 사랑하면 금세 타버리는 사람이라 나는 언제나 적당히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믿었다. 감정을 다 쓰지 않고, 마음을 덜 내어주는 것이 성숙함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쌓이며 나는 어느새 겁 많고 조심스러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타인의 감정을 잘도 흡수해 버리는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평생 '적당히 사는 법'을 배우려 애써왔다. 세상의 잣대에 쉽게 꺾이고 금세 닳아버리는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라 여겼다. 그러나 적당함은 내게 맞지 않았다. 적당히 살려할수록 마음은 더 세차게 흔들렸고, 조심하려 할수록 더 많이 파고들었다. 감정의 깊이를 스스로 재단하며 살다 보니, 어느 순간 내 안에서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다. 웃을 때에도, 슬플 때에도 일정한 틀 속에 나를 가두며 견딘 시간들이 길었다.


이별하면 끝을 모르고 아파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사랑이란 게 마음을 모두 태워야만 진짜라고 믿었다. 지독하게 사랑했고, 지독하게 무너졌다. 마약성 진통제라도 있다면 조금은 나아질까 싶을 만큼 큰 열병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감정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도록 애써왔다. 다시는 그렇게 무너지지 않기 위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랑에도, 기대에도, 실망에도 기준을 두며 살아왔다. 그게 나를 지켜줄 거라 믿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여전히 식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더 사랑받을 수 있는지쯤은 알고 있었다. 말 한마디, 표정 하나, 물러서야 할 거리도 계산할 줄 알았다. 하지만 무릇 사람이라는 동물은 해준 것보다 더, 베풀었던 것보다 더한 것을 원한다는 걸 알기에, 나는 스스로 정한 선 너머로는 나아가지 않았다. 적당히 배려하고, 적당히 희생하며, 적당히 기대했다. 그게 나를 지키는 방법이었지만, 동시에 나를 갉아먹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적당한 나'는 점점 무거워졌다. 아프지 않은 대신, 벅차게 살아본 기억이 줄어들었다. 감정을 남겨두고 적당히만 쓰는 습관은 어느새 삶 전체의 온도를 식혀버렸다. 무너지지 않는 법을 배웠지만, 그것은 곧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법이기도 했다.


창문을 열면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은 여전히 가을의 냄새를 품고 있지만, 그 끝에는 이미 겨울이 서 있다. 계절은 늘 이렇게 앞서가고, 나는 늘 뒤늦게 깨닫는다. 가을은 잠시 머물다 사라지지만, 그 짧은 시간 안에서 사람의 마음은 유난히 많은 걸 배우게 된다. 나는 이 계절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지금까지 내 안을 지탱해 온 '적당함'이라는 방패를 벗겨내려 한다. 이제는 조금 덜 조심스러워지고 싶다. 적당함이라는 단어로 타협하지 않는 감정을 되찾고, 관계에도 촉촉이 물을 뿌려주고 싶다. 적당한 관계, 적당한 타협, 적당한 하루를 흘려보내며, 진심으로 무언가에 닿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


낙엽이 모두 떨어져도 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계절은 이렇게 매년 흘러가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조금씩 다른 사람으로 남게 된다. 마흔의 문 앞에서 나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고, 흔들려도 괜찮다고 생각하려 한다.


바람이 분다. 계절은 또 다른 방향으로 바뀌어간다. 나는 이 짧은 가을의 끝에서, 적당했던 나에게 작별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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