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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익는 집

헤롱헤롱

by 해이



우리 집에는 자주 술 냄새가 났다.

정확히 말하면 술이 익어가는 냄새였다.

계절과 상관없이 그 냄새가 스멀스멀 퍼지면, 아, 또 엄마가 술을 빚는구나 싶었다.


겨울이면 아랫목 한가운데에 큼지막한 술통이 놓였다.

둥근 다라이통 혹은 항아리 위에는 늘 두툼한 모포가 덮여 있었다.

엄마는 그 위에 손바닥을 얹으며 "쉿, 시끄럽게 하면 술이 토라져" 하고 말했다.

아이 눈에는 그 말이 참 신기했다. 술이 사람처럼 토라진다니.

그 순간부터 우리남매는 발소리를 줄이고, 괜히 목소리까지 낮췄다. 술통 하나가 방 안의 긴장을 지배하곤 했다.


엄마가 술을 빚는 풍경은 지금도 또렷하다.

고두밥을 찌고, 누룩을 넣고, 큰 주걱으로 천천히 저을 때마다, 집 안은 금세 달큰한 향으로 가득 찼다.

코끝을 간질이는 알싸함 속에 묘하게 따뜻한 냄새. 그 냄새가 점점 진해질수록 술은 잘 익어간다는 신호였다.


아이들에게는 술보다 감주가 주인공이었다.

보름달처럼 희끗한 색깔에 달콤한 맛, 혀끝을 간질이는 탄산 같은 감촉. 술보다 먼저 익은 감주는 언제나 우리들의 침샘을 자극했다. 엄마가 작은 사발에 담아주면 서로 더 많이 먹겠다고 다투기도 했다.

그 순간만큼은 술 익는 집이 아니라 '감주 익는 집' 같았다.

먹을 것이 그리 넉넉치 않았던 탓에 그 감주는 정말이지 황홀하기까지 한 간식이었다.




그런데 어린 나에게는 술통이 조금 얄미웠다.

엄마가 나보다 술통을 더 아끼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모포를 덮어주고, 숨소리까지 죽여가며 지켜내는 엄마의 모습이 꼭 아기를 대하는 것 같았다.

괜히 심술이 난 나는 술통 위 모포 틈에 구슬이나 장난감을 숨겨두곤 했다.

나에게 더 신경을 써줬으면 하는, 유치하지만 간절한 어린 마음이었다.

그 장난감이 걸리는 날에는 모포를 들췄냐며 혼이 나기도 했지만, 왠지 억울한 마음은 가시질 않았다.




술이 다 익는 날이면 집안 풍경은 확 달라졌다.

어른들이 삼삼오오 모여 밤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사발을 돌렸다.

술잔이 부딪히는 소리, 붉게 달아오른 얼굴들,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우리들은 그 곁을 맴돌며 어른들의 세계를 훔쳐보았다.

술은 마실 수 없었지만, 웃음과 화기애애한 공기는 고스란히 우리 차지였다.

그리고 거나하게 취하신 어른들은 몇백원씩, 혹은 몇천원씩 용돈을 주시기도 하였기에

그날은 은근히 기대가 가득한 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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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나는 엄마 몰래 술통에서 한 대접을 퍼 마셨다.

엄마가 일하러 나간 틈을 타 호기심이 도진 것이다.

감주처럼 달콤할 줄 알았는데, 목을 타고 내려가는 순간 매콤하고 알싸한 불이 확 치고 올라왔다.

그날 나는 종일 비틀거리며 헛소리를 해댔다.

오빠와 동생은 내 꼴이 우스워서 배를 잡고 굴러다녔고, 엄마는 집에 돌아와 펄펄 뛰셨다.

그때는 혼이 났지만, 지금 돌아보면 우리 집 술 익는 풍경 속 가장 코믹한 장면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 시절 술은 단순한 술이 아니었다.

기다림이었고, 잔칫날의 신호였고, 온 집안에 스며드는 냄새였다.

술통 위에 모포를 덮던 엄마의 손길, 말조심을 당부하던 낮은 목소리, 그리고 감주 사발을 들고 기뻐하던 우리들.


술은 사람을 모이게 하고, 웃음을 번지게 하고, 아이들의 추억을 달게 채우는 매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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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더 이상 집에서 술이 익지 않는다.

술통도, 모포도, 엄마의 분주한 손길도 사라졌다.

그러나 가끔 밤이 깊어갈 때면, 그 냄새가 불쑥 되살아나는 것 같다.


어른이 되어 술을 마셔보니, 맛은 그저 쓰고 화끈했다.

하지만 내가 찾는 건 맛이 아니라 냄새와 분위기였다.

익어가던 술의 냄새, 그 옆에 있던 엄마, 그리고 웃음 가득한 집의 공기.


나는 아직도 그 술 익는 집 안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세월이 흘러도, 그때의 풍경이, 그때의 향기가, 그때의 온기가 여전히 내 안에서 익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은 첫 술을 몇 살때 드셔보셨나요?


냉장고속에서 시원해지고 있던 소주를

물인 줄 알고 벌컥벌컥 마셨던 기억,

감주의 맛을 상상하고 들이켰던 동동주의 기억,

거스름돈은 용돈하라며 쥐어주고 시켰던 탁주 심부름길, 몰래 한모금 마셨던 기억.


어른들 몰래 여드름을 물들인 얼굴로 소주 한잔 마셔보던 사춘기때의 기억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교수님보다 무서운 선배에게 잔을 받던 기억


다들 이런 기억 하나쯤은 있으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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