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진짜 나빠! 미워!
가을 운동장은 눈으로 보기에도 바삭하게 말라 있었다. 바람이 한번 불면 낙엽이 모래 위를 긁어내며 휙 돌아다녔고, 그럴 때면 마음도 같이 들썩거렸다. 그날 2교시 시작 종이 치자 선생님이 교실 문을 활짝 열며 말했다.
"오늘 체육시간엔 특별활동 할 거야."
선생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교실의 공기는 뜨겁게 달궈졌고, 특별이라는 말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운동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내려가며 친구들이 웅성거렸다.
"이번엔 줄다리기 아니지?"
"아니야, 그건 저번주에 했잖아."
"이번에도 1등 하면 상 주시겠지?."
"1등 상품으로 껌 다섯 개만 주셨으면 좋겠다아-"
괜히 다들 기대 반 흥분 반으로 몸을 들썩이며 걸음을 재촉했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에 힘이 더 들어갔다. 운동장에 발을 딛자마자 햇빛이 눈부셔서 눈을 찡그리면서도 오늘은 뭔가 내가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운동장 한쪽엔 그네랑 시소가 줄지어 서 있었고, 느티나무들이 그림자처럼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쥐똥나무랑 향나무로 된 담장이 운동장을 에워싸고 있었다. 선생님은 우리를 앞에 세우고 양손을 허리에 얹은 채 말했다.
"자! 오늘의 특별활동! 보물 찾기를 시작한다."
그때부터 내 심장은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사탕처럼 쿵, 쿵 뛰기 시작했다.
"3등까지 있고, 다 찾으면 호루라기 불 거니까 그때까지 열심히 찾아봐. 1등 상품이 뭔지는 안 알려줄 거야."
그 말에 여기저기서 기대감이 비눗방울처럼 톡톡 터졌다.
"껌일까?"
"라면땅일 수도 있어!"
"아니야, 또 공책이겠지!"
여러 추측들 사이로 나도 괜히 혼자서 '1등이면 뭘까? 내가 하면 좋겠다' 하며 이미 마음 한쪽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입에 가져가는 순간, 우리 모두는 이미 출발할 방향을 정해둔 상태였다. 내 몸은 살짝 앞으로 숙여져 있었고, 마음은 이미 느티나무 근처를 향하고 있었다.
"삐-----!"
호루라기가 울리자마자 우리 열한 명은 폭죽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곧장 느티나무 쪽으로 달렸다. 모래를 밟을 때마다 발밑이 푹푹 꺼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나무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바닥을 눈으로 훑었다.
'혹시 파묻었나?' 싶어서 무릎을 꿇고 맨손으로 모래를 마구 파기 시작했다.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와르르 쏟아졌고, 바람이 불 때마다 얼굴로 모래가 달려들었지만 상관없었다.
정글짐 위에도 올라가 보고, 미끄럼틀 아래쪽도 뒤집어보며 계속 정신없이 움직였다. 그 와중에 찾았다는 소리가 여기저기 튀어나올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만 못 찾으면 어떡하지? 하는 조급함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제발, 하나만, 하나만...'
쉴 새 없이 눈을 굴리는 사이, 쥐똥나무 가지 틈에서 희미하게 흰 종이가 삐죽 튀어나와 있는 걸 봤다. 햇빛에 반사되어 살짝 반짝이는 그 종이는 마치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있다!!!"
나는 거의 점프하듯 팔을 뻗어 종이를 꺼냈다. 펼치기 전부터 심장이 쿵쿵 울렸다. 혹시, 혹시 이게 1등이면 어떡하지? 손이 벌벌 떨렸다.
조심스럽게 펴보자, 굵은 글씨가 눈에 확 들어왔다.
글씨를 확인한 내 온몸에 전기가 지나간 것처럼 짜릿했다. "나 2등 찾았다!!!"라고 외치며 친구에게 보여줬다. 세상이 온통 밝아진 것 같았고, 운동장을 걷는 게 아니라 민들레 홀씨처럼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그때 옆에 있던 친구 하나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야, 너만 찾냐? 나도 좀 도와줘."
기분이 너무 좋았던 나는 냉큼 도와주마 하며 종이를 바지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친구와 함께 다시 느티나무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처음보다 마음이 훨씬 넉넉해져 있어서 친구를 도와주는 일이 전혀 귀찮지 않았다. 그래도 또 뭔가 나오면 좋겠다 싶어서 나무껍질 틈이며 뿌리 근처까지 눈을 굴렸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 있던 느티나무 줄기 한쪽, 껍질이 갈라져 있는 틈 사이에 또 하얀색 종이 한 장이 살짝 보였다. 이번에는 망설임도 없이 곧장 손을 뻗어 잡아챘다.
"또 있다!!!"
나도 모르게 소리가 크게 나왔다. 친구도 깜짝 놀라 달려왔고, 이미 나는 그 종이를 펼치며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와, 이제 2등도 있고 3등도 있다. (이건 거의 보물찾기 천재급 아닌가. 히히)
혼자 세 개 찾은 애도 있나? 근데 1등은 뭘까? 괜히 또 설레기 시작했다.
"삐------!"
종료 호루라기 소리가 퍼졌다. 나는 위풍당당하게 선생님 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뛰는 중에 바지 주머니가 너무 허전하게 느껴졌다.
'어? 왜 이렇게 가볍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 없다.
'잠깐만... 설마...'
다시 넣었다.
2등 종이가 사라졌다.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방금까지 훨훨 날아대며 들떴던 마음이 갑자기 바닥으로 떨어졌다. 머릿속에서 장면들이 쉴 새 없이 되감기처럼 돌아갔다. 그런데 찾을 방법이 없었다. 이미 호루라기는 울렸고, 모두 모이고 있었다.
더 당황할 틈도 없이, 방금 내 옆에 있던 친구가 내 손에 있던 3등 종이를 쓱 빼앗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이건 내 거지?"
그리고는 잽싸게 줄 앞으로 가서 선생님께 내밀어버렸다.
나는 손을 뻗을 겨를조차 없었다. 그 친구는 3등 보상인 롤리팝 사탕을 받고 싱글벙글 돌아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뭐라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미 2등 종이도 없었기 때문에 돌려달라고 할 자신도 없었다. 내 손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선생님은 참가한 우리 모두에게 동그랗고 하얀 콩알사탕 한 알씩 나눠주셨다. 작고 단단한 사탕. 혀에 올리면 별맛도 없는 사탕. 그런데 그게 입속에서 녹는 동안 가슴까지 같이 싱겁게 녹아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옆을 보니 내가 도와줬던 그 친구는 사탕 한 봉지를 들고 있었다. 그게 분명 2등 상이었다.
"그거.. 2등 하나였잖아..."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친구는 콧방귀를 뀌듯 대답했다.
"아니거든. 내가 집에서 가져온 거라니까."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서 엄마에게 이야기했는데, 엄마는 "그걸 왜 잃어버려? 네가 잘 간수했어야지"라고만 말했다. 기대했던 위로는 없었다. 그렁그렁 눈물이 올라왔지만, 어른 앞에서 울면 더 혼날까 봐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조용히 엎드려 있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머리맡에 뭔가 동그란 봉지가 있었다. 손에 집어 들어보니, 어제 그 친구가 들고 있던 것과 똑같은 사탕 봉지였다. 묘하게 따뜻한 느낌이 손끝에서 올라왔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내 얘기를 들은 할아버지가 새벽 일찍 걸어서 왕복 1시간이나 되는 길을 다녀오신 거였다. 아무 말 없이, 그냥 가져다 놓으신 거였다.
그날 나는 그 사탕 봉지를 들고 학교에 갔다. 쉬는 시간에 친구들에게 한 알씩 나눠주었다. 어제 종이를 빼앗아 간 친구도 멈칫하다가 사탕을 받아갔다. 그걸 보며 마음 한쪽이 묵직해지는 것 같았다.
근데 이상하게 사탕을 나눠주고 나니까, 나는 뭔가 2등으로 끝난 것 같진 않았다.
다른 방식으로 이긴 느낌이 들었다.
그때 그 일을 선생님께 고자질을 했어도 됐고, 그 친구에게 따져 물으며 다퉜어도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것은 그 친구와 멀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싸우고 싶은 마음을 잘 표출하지 못하는 찌질보스이긴 했다.)
그날 내가 건넨 자두맛 사탕은 그 친구와 나의 사이를 다시 연결해 주었다.
자두맛 사탕은 다른 사탕과 달리 입 안에서 끈적하게 녹는다. 그 끈끈함처럼 우리는 다시 붙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너 나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