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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원의 전쟁 (블랑카와 아도겐)

류! 다음엔 반드시 내가 이긴다!

by 해이



한 손에는 백원 짜리를 덜렁덜렁, 다른 손에는 땀.

그날도 오락실까지 걸어가는 길은 멀었다.


집에서 출발하면 높은 산비탈을 오르내려야 했다. 아이들 걸음으로는 약 40분정도가 걸리는 길이었다.
그 길 끝에 간판도 없는 낡은 오락실이 있었다.
끼이익 소리를 내며 양옆으로 여닫히는 문을 열면 (그때 말로는 스뎅샷시) 오락기가 나를 맞이했다.

좁은 공간을 꽉 메운 대여섯대의 오락기 기계가 내뿜는 불빛을 보는 순간부터는 다리가 아픈 것도, 햇볕이 뜨거운 것도 상관없었다.

오락실 문을 열자마자 퍼지는 뜨거운 먼지 냄새, 기계들이 내뿜는 "띠띠띠띠띠- 삐용삐용-"하는 전자음 그리고 동네 애들의 고함이 뒤섞인 그 혼란스러움이 내겐 천국이었다.


"다음은 내 차례야!"
"새치기 하지마! 밀지 말라니깐!"


게임의 종류가 그렇게 다양하지도 않았다. 아이들은 대부분은 스트리트파이터 앞에서 목을 빼고 기다렸다.
내 차례가 오기까지 한 아이는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하고, 등을 떠밀며 재촉하기도 했다.


오락기 속에서 블랑카가 점프했다, 전기가 번쩍였다, 그 순간마다 심장이 블랑카의 전기공격을 맞은 것처럼 찌리릭거렸다.


드디어 내 순서.
스트리트 파이터 기계 안에 백원을 밀어 넣자 "땡그랑" 하는 소리가 났고, 화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짧은 찰나가, 마치 세상이 나만을 위해 돌아가는 것 같았다.


나는 늘 블랑카를 골랐다. 몸을 부르르 떨며 전기를 내뿜는 초록 괴물.
그 단순한 공격으로 컴퓨터를 연달아 이기자 뒤에서 구경하던 애들이 웅성였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동네 최강자였다.

하지만 그때 어깨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나랑 한 판 해!"


동네 오빠였다. 순식간에 긴장이 몸을 덮쳤다.
게임이 시작되고,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오빠의 캐릭터인 "류"가 내 블랑카를 계속 밀어붙였다.


"아도겐! 아도겐! 워류겐!!"


순식간에 K.O. 모니터엔 ‘You Lose’가 떴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음엔 꼭 이길 거라고 다짐하면서.


그래도 마음이 진정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 옆자리 "뽀글뽀글" 로 옮겨갔다. 초록색 공룡이 통통 튀며 거품을 내뿜고, 거품에 갇힌 괴물들이 "팡!" 하고 터질 때마다 기분도 같이 터지는 것 같았다.

시계를 먹으면 시간이 늘어나고, 신발을 먹으면 속도가 빨라졌다.
그 작은 아이템 하나에 세상이 다시 내 편이 된 것 같았다. 오빠에게 졌다는 사실은 그 순간만큼은 아무런 방해거리도 되지 않았다. 게임 속 공룡이 친구라도 된 듯, 나는 그 화면 안에서 실컷 뛰어다녔다.

손끝에 닿는 버튼의 탄력, 눈앞에서 반짝이는 알록달록한 거품. 그건 어린 나에게 승리보다 더 큰 즐거움이었다.


가끔 용돈이 생기면 오락기 위에 백원짜리 동전을 줄지어 올려놓고 그 순간을 즐겼다. 그 동전들이 반짝이는 걸 보면, 입으로는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마음만큼은 배가 불렀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늘 컵볶이를 손에 들고 있었다. 200원짜리 컵볶이를 사서 후후 불어가며 먹을 때면, 매운 양념보다 더 화끈한 오늘의 승리를 마음에 품었다.



e5094ec9-2ecd-4ab0-acfb-ecb4b49e06ba.png 류! 너! 다시 한 번 붙어!!



그러다가 가끔 동네 어른들이나 친척들에게 용돈이라도 받는 날이면 그건 전부 '연습 자금'이 되었다.
동네 오빠를 한 번이라도 이겨보겠다고,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오락실로 달려갔다.
가방은 바닥에 던져두었다. 먼지가 앉든 말든 상관없었다. (물론 엄마의 등짝 스매싱은 서비스로 따라왔지만)
화면 속 '류'가 장풍을 날릴 때마다 나도 같이 그것에 맞은 듯 몸을 날렸다.


그렇게 얻은 백원짜리 동전들은 순식간에 녹아내렸고, 손끝에는 땀과 함께 패배만 남았다.

돈이 떨어지면 연습장소는 집이었다.
스케치북에 오락기 버튼을 그리고, 그 위에 화살표를 잔뜩 그려 넣었다.
손가락으로 '왼, 아래, 오른, 펀치'를 누르며 머릿속에서만 싸움을 이어갔다.

물론 그런 연습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그때의 나는 그 스케치북 하나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락을 사랑하던 아이는 그렇게 중학생이 되었다.

그 때는 바야흐로 "펌프와 DDR의 시대"


화면 위로 빠르게 오르는 화살표를 따라 바닥에 자리한 발판을 박자에 맞춰 밟아야 했다.
오락실 중앙엔 그 시대의 유행을 따라 펌프 기계가 세대나 줄지어 있었고, 화면엔 네 개의 화살표가 미친 듯이 솟구쳤다.


그때 배경음악 또한 유행을 따랐다. 노바소닉의 "또 다른 진심"
스피커에서 터져 나오는 전자음이 심장을 자극하며 함께 뛰었다. 우리는 그 노래만 들으면 본능적으로 발이 들썩였다.

당시엔 '족보'라는 게 있었다.
종이 위에 화살표 순서가 빽빽히 인쇄된 그것을 모두가 한 장씩 가지고 다녔다.

그 종이가 어디서 생겼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누군가의 손에서 손으로, 복사되고 또 복사되어 전교생의 필수품이 되었다.


쉬는 시간마다 남자애들은 교실 뒤편에 모였다. 책상을 옆으로 밀고, 바닥에 족보를 펼쳐놓고, 빠른 발놀림으로 박자를 따라 밟았다. 여학생들은 그 주위를 빙 둘러서 구경을 했다.

"야, 저걸 다 외웠네"

가슴을 쿵쿵 울리는 그 노래와 발소리는 그 시절 교실을 가장 뜨겁게 만들었다.

그 시절의 부모님들은 우리를 혼내기에 바빴지만, 우리에게 그것은 그저 또 하나의 오락이자 심장이 터질 만큼 진심이었던 놀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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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는 중년이 되었고, 스트리트파이터도, 펌프 기계도 사라졌지만
그때의 불빛과 소리, 박자만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그 시절, 오락이 있었기에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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