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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해인 Jul 09. 2024

젊음아. 너는 영영 그곳에 있거라.

(24.07.09)


이윽고 봄입니다. 새벽의 분량 혹은 소매의 길이 따위가 짧아집니다.


 오늘은 동네 시장에서 국거리를 사 왔습니다. 수선스러운 주말의 야시장 휘적휘적 쌀떡볶이를 만드는 분식집 아주머니와 쭈그려 멸치똥을 따는 할머니를 지나치며 나는 생각합니다. 그들의 꿈이 과연 저것이었을까 하고. 친구들과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얼로 밥벌이를 할 지에 대한 따분한 이야기. 사람 구실도 해야 하고, 사랑도 해야 하고, 섹스도 해야 하지만 오늘 하루 무얼 했는지 둘러보면 무탈한 하루가 또 지나가고. 꿈을 꾸기를 포기한 이들을 바보라 놀렸던 내가 점점 그들을 이해하게 되고. 어쩌면 꿈을 끝까지 붙잡고 있는 것이 더 바보 같은 일은 아닐지, 내가 내린 결단이 훗날 일련의 과정의 될지, 일말의 결론이 될지. 이런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 즈음은 알고 있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그 안정이 얼마나 필요했는지. 그래도 너희가 있어서 좋다며 날이 밝으면 하지 못할 이야기로 온통 밤을 지새우고는 술에 취한 탓이라며 진심을 둘러댑니다.


 오가는 삶에서 다양한 것을 겪으며 시기적으로 특정한 것을 편애합니다. 때로는 우정이. 때로는 애인이. 가끔은 신념이 커다란 일부가 되어 나를 대변합니다. 하지만 바라는 것이 큰 탓인 지, 내가 지닌 것이 워낙 작은 탓인 지. 열정을 짓고 하루를 온통 매진해도 돌아오는 것이 한없이 작습니다.

 그럼에도 청춘을 쏟지 않았다면 그 진부함조차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를 온전히 바쳐야 고작 얻어낼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엄마는 젊음을 바쳐 나를 만들었고, 아빠는 자신을 바쳐 나의 행복을 지탱합니다. 나의 스스럼입니다. 고맙다는 한마디도 망설이며 이런 글을 잘도 끼적인다는 것이 내심 부끄럽습니다.


 흐릿할지 언정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오늘이 급격히 좋다기보다도 하루를 대체할 마땅한 것을 찾지 못합니다. 무탈한 모양새를 견디기 어려워 반드시 하루를 기록하려 하고, 거창한 표현을 빌려 예술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사상은 그다지 엉터리입니다. 나의 마음엔 양극이 존재하여 영원과 종말을 동시에 믿고, 내가 지닌 어떤 욕망은 신뢰를 깰 정도로 거대합니다. 아울러 나는 모든 것을 애정하지 못합니다. 나의 관심사 이외에는 무지하여 지극히 무정합니다. 격차는 오차가 되어 오해를 유발하기 쉽습니다.

 까닭에 나의 저변은 늘 소란합니다. 나는 나의 언어로 타인을 이해하기에 접하지 않은 세상과 다소 분쟁합니다. 나는 시시때때로 타인을 평가하고, 타인에 의해 왜곡됩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날이 선 말도 할 줄 알고, 미운 마음을 능하게 품어 머릿속에 뾰족한 단어를 곧잘 나열하고는 합니다. 쌓아온 결핍으로 편견을 빚었고, 못난 언어로 자신을 깎아냅니다. 까끌거려 보기에 표독스럽습니다. 미운 마음이 가득 찬 나의 유년은 청춘이라는 형체를 지닐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깨달은 사실은, 시기적으로 특정한 것을 편애하듯 어떤 시기는 특정한 고민을 유난히 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애정은 시기에 따라 녹슬어 삶과 편애의 대상은 자연스레 뒤바뀝니다. 현실이 궁핍했던 사춘기, 나에게 꿈은 유일한 탈출구였으며. 그 꿈을 놓으려 할 무렵 애인이 내 행복을 지켜주었고. 그 애가 떠나갔던 그날, 친구들이 붙잡아준 수많은 밤을 나는 여전히 기억합니다.

 모든 인연에는 언젠가 끝이 존재하지만 시작하기도 전에 끝을 염두하고 싶지 않습니다. 때로, 어떤 마무리는 여운이 참 짙어 시작에 장애가 되기도 하지만 나는 차라리 엉터리 같은 마음을 품어버리고야 말겠습니다. 수차례의 종말을 겪고도 영원을 속삭이며, 한평생 신을 부정하다가도 두 손 모아 기도를 하는 엉터리 같은 인생 말입니다. 모순적이게도, 나는 모순된 삶의 형태에서 진정한 나를 배웁니다.


 모든 사건을 논리적으로 차곡차곡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겪은 세상만큼 타인을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의 전제는 편견을 걷어내고, 나의 결함을 탐닉해야 합니다. 상처의 깊이를 알기에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자상의 흔적을 짐작하고, 나아가서는 기꺼이 헤매는 이들에게 상처를 허용하는 사람 말입니다. 아픔을 가로질러 나는 타인을 기꺼이 이해하고자 합니다. 증오는 집단을 결속하는 가장 좋은 도구지만, 개인의 사상을 철저히 분리하므로. 과정이 몹시 따끔할지라도 나와 타인의 폭을 넓히고 싶습니다. 혼자보다는 함께가 낫고, 증오보단 사랑이 좋고, 망상보다는 이상이 적합합니다. 청춘에 근접한 모든 젊음에게 감히 얘기합니다.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평생 멈추지 말자고.


 시장에서 돼지국밥과 소주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아저씨들은 분명 행복해 보였습니다. 늙지 않을 거라는 오만, 삶이 영원할 것이라는 오만을 그들 또한 지녔을지도 모릅니다. 거동이 어려워 지팡이를 지탱하는 할아버지도 청춘 무렵 이마에 끈 둘러매어 앞자락에서 대모를 했을지도 모르고, 검버섯 할머니도 찬란할 만치 고운 유년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들도 찬란한 내일을 그리며 이상을 좇다 같이 넘어지고 견뎌내는 법을 배웠을 겁니다.

 한시의 절정은 꾸준한 노력에 기인합니다. 지금껏 마주친 나날은 그저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양한 감정과 현실이 나의 하루를 힘겹게 지탱하지만 어딘가에 기대는 것은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느긋하지만 빠르게 지나버린 시간이, 기어코 외면했던 나의 모습이 청춘으로 추억되고자 합니다. 나는 나의 언어로 세상을 알아가기에. 존재하는 모든 상처를, 소외된 모든 이들을 고스란히 깨달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당신과 세상을 함께 살아가고 싶습니다. 모든 아픔을 딛고 일어선 평범한 우리가 다가올 계절을 기대하며 지나온 계절을 얘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계절이 고민을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나의 하루를 채색할 수는 있으니까요. 


 나는 문득 타인의 유년이 궁금합니다. 온화한 호기심이 가증스러운 마음을 추월합니다. 결국에는 다정한 것이 이긴다는 그 아이의 말을 인용하여 나는 쓰던 문장을 모조리 지우고 그리고 한 줄로 진심을 기록합니다.


- 젊음아. 너는 영영 그곳에 있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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