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림역 2번 출구앞에 도착하면 연락 주십시오.]
정말 추웠던 어느 겨울날,
한 회사로부터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고 나는 신도림역에 도착해 문자를 확인했다.
(지금은 이름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회사의 인사담당자의 문자를 거듭 확인한 나는 조심스레 전화를 걸었고, 인사담당자분은 전화를 받자 마자
"회색 아반떼 보이시나요?" 하고 물었다.
나는 영문을 몰라 "네?"하고 되물었고
"아니 회색 아반떼 보이냐고요!" 조금 큰소리로 묻는 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때, 깜박이를 켜고 불안하게 서있는 차 한대가 눈에 들어왔다.
눈을 찡그려 차의 이름을 보니 A..V.. 저건가?
"아 네! 보이는 것 같아요"
"타세요"
"네?"
"신호 끝나기 전에 얼른 타세요"
여전히 영문을 모른 채 나는 그 차를 탔다.
-
지금의 나였다면, 아마 절대 그 차를 타지 않고 그대로 돌아섰을것 같다.
물론 이 회사는 무섭거나 이상한 곳은 아니었지만
유독 택시나 차를 잘 타지 않는 내가 그때는 어쩜 차에 덥석 탔는지...
그게 바로 취업에 대한 간절함 때문이었겠지.
"회사까지 좀 길이 험해서요"
"아.. 네 고맙습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차에 탔다는 사실은
면접에 대한 초조함과 한겨울의 추위로 이미 움츠러든 나를
더더더더욱 긴장하게 만들었고,
그 와중에 나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휴대폰의 배터리가 충분한지 확인한 뒤 한 손에 꼭 쥐었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차문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길게 늘어지는 듯 느껴지던 시간의 끝에 도착한 곳은 역에서 차로 10분 정도 걸리는 한 공터였다.
"도착했어요-"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 그렇군요. 여기가 회사군요. 대체 여기는..'
나는 점점 더 무서워졌다.
내가 내린 곳은 텅 빈 공터였고,
그 곳에는 큰 컨테이너 두개가 마주본 채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당황한 내가 당연하다는 듯 인사담당자는 내게
"지금 회사가 이사를 하는데 중간에 기간이 좀 안맞아서…"라며 말끝을 흐렸다.
나는 마음과 달리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마치 이런 상황이 처음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담당자는 멀뚱히 서있는 나를 그 중 하나의 컨테이너로 데려가 문을 열고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다시 돌이켜보니 더 아찔하네)
그 찰나의 순간, 나는 생각했다.
아. 피할 수는 없는가, 들어가도 되려나
여기는 뭘 하는 곳이고 이 사람들이 대체 누군지 알고 나는 여기까지 왔는가.
당시 제일 큰 채용 사이트를 통해 지원한 회사였고, 업력이 오래된 진짜 회사도 맞았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겁이났다.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나는 컨테이너 중간에 놓인,
마치 [1970년대 서울의 양옥집 전시회]에서 본 듯한,
자개로 장식된 진한 갈색 가죽 소파에 앉아 있었다.
"회장님 곧 오실거에요."
"네."
비서로 추정되는 다른 직원분이 내게 물을 건네며 말씀하셨다.
나는 물을 받아 들고 길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때 70대 정도로 보이는 분이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오셨고
본능적으로 회장님의 기운을 느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꾸벅-인사를 했다.
"앉아요. 늦어서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양복을 꼼꼼히 챙겨 입으신 회장님이 들어오시자
다른 분들은 모두 컨테이너 밖으로 나가셨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보던 회장님께서 말씀하셨다.
"회사가 좀 누추하죠."
"아 아닙니다."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물론....속마음은 '그러게요. 그럼 안왔을텐데..,'였지만..)
그제서야 앞에 놓인 이력서를 훑어보시던 회장님은 내게
"서울 출생이신가?"
하고 질문하셨고, 그것이 그 분이 내게 한 처음이자 마지막 질문이었다.
나는 그 날 약1시간 동안 회장님이 이 회사를 만들고 실패하고 다시 일으키신
회사의 연대기를 그저 듣기만 했다.
회장님은 나쁜 분은 절대 아니었다. 예의를 갖춰 말씀하셨고
(면접을 다니다 보면 정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예의가 아예 없는 분들이 꽤 많으므로)
중간 중간 자신이 말이 너무 많지 않은 지 물어보셨으며
(하지만 내가 말이 너무 많으시다고 말씀드릴 수 없었을 뿐)
약 3분 정도 내 진로에 대한 걱정도 해주셨다.
회장님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컨테이너 안을 천천히 둘러 보았다.
잘 정돈된 책상, 깨끗한 소파와 테이블, 그리고 크게 걸려 있는
(부끄럽지만 내가 읽을 수 없었으나 어쩐지 회사의 지향점 같이 보였던) 목판 속 한자.
뺵빽하게 꽂힌 팜플렛들과 한 구석에 노란 노끈으로 동여매져있는 낡은 책들 수백 권.
오랜시간 차곡차곡, 많은 부침을 겪으며 만들어나간 회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가 끝난 건 나를 이 곳으로 데리고 와준 인사담당자의 노크 덕분이었다.
"회장님, 출발하실 시간이 다 돼서"
"아 그렇지 시간 가는 줄을 몰랐네."
벌떡 일어나신 회장님은 내게 마지막으로
"늙은이 얘기 들어주느라 고생했어요" 하고 먼저 컨테이너를 나가셨다.
끝?
나도 모르게 "저…"라고 말을 내뱉었으나
"결과는 이번주 안에 알려드릴게요." 라는 인사담당자의 말에 말문을 닫기로 했다.
나는 다시는 오지 않을 이 곳을 한번 둘러본 후 컨테이너를 나섰고, 엉겁결에 회장님을 배웅하기까지 했다.
'급한 일이 있어서 지하철까지 데려다 줄 수 없다'는 인사담당자의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회사를 나서니 아까는 보지 못했던, 똑같은 모습의 컨테이너들이 여러개 있었다.
컨테이너들이 만든 미로 속에서 나는 잠시 멍하니 멈췄다.
패딩을 입고 올 걸 후회하게 만드는 날카로운 추위를 느끼며
그제서야 밀려드는 허탈감이 온 몸을 부들부들 떨리게 했다.
컨테이너에서 면접(이라고 할 수 있다면)을 봤다는 사실보다,
지금까지 경험한 몇몇 회사들에서
내게 질문의 의무도 다하지 않았던, 내 이야기를 들으려는 의지가 없었던 누군가의 무례함들이
얇은 코트 안으로 차갑게, 시리도록 우르르, 얼음조각이 쏟아지듯 밀려들어왔다.
나는 추위를 막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므로
코트깃을 끝까지 꼼꼼히 여미며, 생각했다.
꼭 꿈꾼것 같다고.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다시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 모르겠으니
그저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결과는....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한 마디도 안했는데요…
회장님께서 가장 오래 대화(그것을 대화라고 부를 수 있다면)한 사람이 저라고 하셨다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회사를 다닐 순 없을 듯 해 조심스럽게 거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