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타어학연수 제3장 #4 몰타공연(3) 피아니스트 손열음, 선우예권 공연
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4 몰타공연(3) 몰타에서 손열음, 선우예권 공연 관람
한국에는 아직까지 생소한 나라인 몰타, 그런 나라에 한국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공연을 한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몰타에서 보게 된 피아니스트 손열음과 선우예권의 공연은 어땠을까요?
몇 번을 되물었다. 진짜로 몰타에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오는 게 맞나고.
몰타에서 많은 경험을 해보기를 원했기에 공연이나 축제 등이 있으면 가급적이면 경험해 보려고 노력하던 참이었다. 생판 모르는 외국 뮤지션의 공연도 보러 다니는데 한국인, 게다가 세계적으로도 최정상인 피아니스트 손열음이라니- 이게 무슨 횡재냐 싶었다. 몰타에서 피아니스 손열음의 연주를 들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몰타는 정말 작은 나라인데 여름이 되니 콘서트나 음악회가 축제 못지않게 많았다. 하지만 몰타의 전체 인구만 놓고 보자면 약 40만이 조금 넘는 상황이나 공연이 활성화될 수 있는 정도의 인구는 아니다. 몰타에서 어학연수를 하는 동안 연극, 클래식, 대중음악 등 다양한 종류의 공연을 가봤지만 객석이 다 차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주 정말 다양한 공연이 열리는 것도 신기했다. 그건 EU에서 몰타를 배려해 몰타에서 다양한 뮤지션이 공연을 할 수 있도록 많은 지원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대부분의 공연 가격은 비싼 편이 아니었다. 그마저도 어학연수 생인 경우 학생할인이 적용되니 저렴한 가격으로 공연관람이 가능했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공연은 가장 좋은 자리였는데 학생할인을 받아 35유로니 초대박이지 않은가. 마음만 먹으면 공연 퀄리티가 수준급은 아니어도 한국에서보다 더 많은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것이 몰타였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공연이 열린 곳은 지중해 콘퍼런스센터(MCC)로 중세 몰타기사단의 병원이었던 곳이 현재는 국제회의장, 공연장 등으로 활용되고 있는 고이었다. 건물 자체만으로도 고색 찬란한 느낌을 자아낸다. 공연도 보기 전에 이미 공연장에 반했다고나 할까.
+ 지중해 콘퍼런스센터의 자세한 내용은 https://brunch.co.kr/@haekyoung/107 참조할 것.
몰타 필하모니와 협연으로 첫 연주는 멘델스존의 한 여름밤의 꿈이 연주된다. 그동안 몰타에서 몇 차례 본 클래식 공연과는 수준이 다른 연주다. 이어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무대로 나왔다. 그녀의 공연 레퍼토리는 Alexey Shor Travel Notebook과 Maurice Ravel Piano Concerto in G major였다. '트레블 노트'가 먼저 연주된다. 이 곡은 그동안 다른 공연에서도 연주를 자주 했던 곡이니 그녀에겐 익숙한 곡일 터. 악장 사이의 변화가 큰 곡은 그녀의 손 끝을 따라 물 흐르듯 흘러간다. 그녀가 이끄는 대로 달렸다 멈췄다 흐르는 선율에 집중하고 있으니 몰타가 새삼 여행지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 나 지금 여행 중인거지? 그간 너무 생활인 모드였다.
이어지는 라벨의 곡은 조성진 연주로는 들어봤는데 현장에서 손열음의 연주로 듣는 G major는 확실히 좀 달랐다. 2악장에서부터는 뭔가 계속 울컥거려서 눈물을 참느라 힘들었다. 개인적으로 G minor 코드를 더 좋아하긴 하지만 피아노곡이 가진 G major의 장점이 고스란히 담긴 라벨의 곡은 손열음이라 더 좋았다.
이곳에서 비틀스에서 U2까지 오케스트라+밴드 공연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음향에 따라 편차가 큰 락 콘서트보다 별도의 음향장치가 필요 없는 클래식 공연의 음향이 훨씬 좋게 느껴졌다. 물론 제일 좋은 자리에 앉은 것도 한몫했겠다.
모든 공연이 끝나고 난 뒤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어학연수 중인 한국 사람들 상당 부분 이 공연을 보러 온 것 같았다. 몰타 사람들 중에서도 한국인 피아니스트 손열음을 알고 일부러 찾아왔다는 사람도 있었다. 괜스레 내가 다 뿌듯했다.
조용필과 함께 해 온 밴드 위대한 탄생 20주년에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흑과 백의 두 세계가 피아니스트 최태완의 손 끝에서 하나가 된다'라는 카피를 쓴 적이 있다. 손열음의 음악을 듣고 있으니 문득, 손열음이 만들어 내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궁금해졌다. 그게 뭐가 됐든 세계 곳곳을 다니는 화려한 연주자의 삶 이면엔 수천, 수만 시간을 흑과 백의 세계 안에서 홀로 견뎌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녀가 만들어 내는 고독한 시간 안에서 흘렸을 수천 혹은 수만의 시간들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으랴. 오늘 연주는 친구처럼 따라다니는 외로움이 크게 와닿았던 것 같다. 그간 손열음 연주에서 거의 느껴보지 못했던 느낌이다. 익숙한 세상에서 벗어나 비록 짧게 마주하는 생의 낯선 시간에 찾아온 손열음의 세상. 마음 안에 잔잔한 파문이 한동안 출렁였다.
피아니스트 손열음 공연이 있은 후 얼마 있지 않아 피아니스트 선우 예권의 연주회 소식이 들렸다.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한국인 피아니스트의 공연이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이번 공연은 집 근처인 힐튼 호텔에서 열렸다. 힐튼 호텔의 경우 따로 공연장이 있는 것이 아니고 리셉션 홀을 공연장으로 활용했다. 전문 공연장이 아닌 곳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공연이 시작되고 나니 기우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음향이 훨씬 좋았다.
다소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젊은 피아니스트 선우 예권이 조용히 피아노 앞에 앉는다. 극강의 몰입감이 온몸에 묻어나니 나 역시도 긴장모드다. 몰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잔잔하면서도 서정적인 피아노 선율이 흐른다. 선우 예권이라는 피아니스트는 내겐 생소한 연주자다. 당연히 연주되는 곡도 생전 처음 듣는 곡인데 곡이 진행될수록 그의 연주에서는 5월의 싱그러움이 느껴졌다. 소년미 가득한 선우 예권이라 더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나이를 검색해 보니 무려 33살....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 동안이었다. 그러다 곡이 더 진행할수록 푸른 싱그러운 숲에 함박눈이 소박소박 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참 희한도 하여라. 이 느낌이 너무 신기해서 곡 정보를 확인해 보니 알렉세이 쇼어(Alexey Shor)가 작곡한 ' 어린 시절의 기억(Childhood Memories)'이라는 곡이었다. 주최 측에서 선우 예권에게 연주를 요청한 곡이었다고 하는데 연습 시간은 단 2주였다고 한다. 실로 엄청난 연주자구나 싶었다. 참고로 쇼어는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며 몰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아카데미 상주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다.
공연 중에 갑자기 모두 대피라니요!
진지하게 공연 감상 모드였는데 갑자기 사이렌이 계속 울어댔고 대비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처음에는 잠시 소란에 그칠 줄 알았는데 사이렌이 쉬지 않고 울어 댄다. 연주자들도 관객들도 공연을 멈췄다. 공연을 멈추고 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전부다 밖으로 대피를 했다. 아무런 안내 방송도 없으니 공연이 언제 재게 될지 어떨지 알 수 없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기다리기 치진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환불을 해달라거나 무슨 상황이냐며 담당자 찾고 난리도 아니었을 텐데 몰타는 누구도 그런 사람이 없었다. 그저 이 상황을 조용히 기다리며 그럴 수도 있지 하는 모드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런 차분한 상황이 더 놀라울 뿐이었다. 역시 몰타가 몰타 했다. 피아니스트 선우 예권도 우리와 함께 밖에서 기다렸는데 기회는 이때다 싶어 사람들이 사진을 요청하니 흔쾌히 함께 사진도 찍어 주는 등 약 20여분의 해프닝 시간이 지나간다. 적극적인 관객들은 연주자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도 볼 수 있었다.
연주를 멈추고 관객도 연주자들도 다 밖으로 대피하는 불상사가 있었지만 약 20여분이 흐르고 공연은 다시 재개됐다. 공연의 흐름이 한번 멈춘 터라 집중력이 깨지는 건 아닌가 다소 걱정이 들었다. 리스너인 나는 어수선해 살짝 집중력이 깨졌는데 연주자들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연주가 물 흐르듯 진행됐다. 첫 번째 곡이 다소 서정적인 곡이었다면 두 번째 곡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Sergei Prokofiev) Piano Concerto No. 3 in C major, Op. 26 이 연주됐다. 감상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격정’ 그 자체였다. 좀 전에 서정적인 연주를 했던 사람이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두 곡 사이의 간극이 꽤 컸다. 선우 예권이라는 연주자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큰 지 그를 잘 몰라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연주가 진행될수록 넋을 놓고 그의 연주에 빨려 들어갔다. 연주자에게 이런 느낌을 받은 게 언제 적이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선우 예권의 연주는 어마어마했다.
선우 예권이라는 피아니스트는 이름 정도만 들어봤을 뿐이었기에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검색을 해봤다. 2022년 클래식 무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임윤찬이 우승한 콩쿠르인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Van Cliburn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 출신이었다. 더 놀라운 점은 이 콩쿠르에서 2017년에 한국인 최초로 우승자가 나왔는데 바로 이번에 몰타에서 만나게 된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이다. 피아니스트 손열음도 2009년에 이 콩쿠르에서 은메달을 땄다. 몰타에서 좋은 피아니스트 한 명을 알게 된 건 행운이다.
선우 예권은 의외로 ‘대기만성형’의 연주자라는 표현이 있었다. 엄청나게 화려한 스펙에 비해 다소 늦은 나에게 빛을 보게 된 경우라 그런 말이 붙었겠지만 지금의 자리가 있기까지 본인 스스로 지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그 단어에 다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어학연수가 5개월로 접어들고 이런저런 일들이 생기면서 마음이 다소 풀어지고 있던 차였다. 공부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고 머리는 옛날 같지 않음을 탓하고 있었다. 대기만성형의 다른 의미는 지치지 않고 끝까지 목표를 향해 달려가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피아니스트 선우 예권의 공연 덕분에 어학연수로 지쳐있던 마음에 단비가 내리는 듯했다.
이래서, 때론 위문 공연이 필요한 걸까. 피식 웃음이 났다. 공연을 함께 본 이본과 함께 그냥 집게 가기 아쉬워 동네 편의점에 앉아 마시는 맥주 한 캔이 유난히 달았다.
+ 다음 이야기 : 사진 한 장 때문에 유명해진 동굴.
'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1장은 매거진에서 볼 수 있습니다.
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런던
https://brunch.co.kr/brunchbook/life-of-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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