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행복, 잠시 우려를 잊기

by 해니

우려는 불필요함을 몸소 증명이라도 하듯이 숙희 씨는 여행 내내 씩씩했다. 강철 같은 체력을 지닌 아빠와 렌터카가 금방 에너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우리를 싣고 다녀 준 덕분이기도 했다. 여행을 하는 내내 엄마는 아팠던 적 없는 사람인양 열심히 다녔다. 힘든 걸 잘 감추기도 했고 정신력으로 잘 버텨내는 게 특기였으니까.


LA에서 우리는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도 다녀오고 그리피스 천문대와 산타 모니카 해변에도 갔다. 내 눈에도 이제는 완연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된 두 분의 눈은, 다채로운 미국의 풍경보다도 그 가운데에서 해맑고 명랑하게 누비는 손녀를 더 쫓아다니는 듯 보였다. 기념품 샵에서도 손녀 입힐 티셔츠를 고르고 멋지고 재미진 장식물을 보면 어서 와서 보라고 손짓하기 바빴다. 한적한 공원의 잔디밭에서 윗몸일으키기를 하는 손녀를 할머니가 잡아주며 깔깔 웃기도 했다. 사실 성인이 된 딸과 어린 손녀를 노후에 접어든 부모가 여행을 데리고 가는 일은 정말 흔하지 않다. 다니는 내내 마음 한구석에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괜히 저희가 끼는 바람에 엄마 아빠가 비즈니스석 못 타고 왔네요. 돈도 더 많이 들구......”

“너희랑 왔으니 됐다. 비즈니스 그거 다음에 타면 되는데 뭐.”

“재밌게 놀다 가면 된 거야.”


안 그래도 소심한 딸이 신경 쓸까 봐 무심한 듯 시크하게 건네는 말에서 몽글몽글 사랑이 느껴졌다. 엄마와 아빠는 조부모로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을 여행지에서 충분히 만끽하고 있었나 보다. 그때는 아이 챙기느라 몰랐지만 사진과 영상 속 두 분의 표정을 보고 알 수 있었다. 한가득 담긴 미소와 눈빛들이 이번 여행이 주는 진짜 의미가 아니었을까.


여정의 중반 즈음에는 라스베이거스에 다녀왔다. 굼뜬 딸내미 때문에 메인 스트립에서 조금 떨어진 카지노 리조트에 머물게 되어 조금 송구한 마음을 안고 도착했다.(사실 비용이 만만찮기도 했다.) 거대한 분수를 옮겨 놓은 듯한 무대에서 펼쳐지는 아크로바틱 공연을 함께 보며 탄성을 질렀고 넷이서 길거리 피자를 먹으며 현란한 밤거리를 구경했다. 숙희 씨도 나도 라스베이거스는 두 번째였다. 몇 년 전, 엄마는 외삼촌과 함께 이곳에 왔었는데 그때는 컨디션이 더 좋지 않았어서 충분히 즐기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의 엄마는 좀 달랐다. 메인 거리에서 숙소까지 돌아가는 길이 조금 길었는데 나란히 걷던 엄마가 말했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빌빌거리느라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이 거리를 이렇게 오래 걷다니 감개무량하네.”

“엄마 진짜 많이 좋아졌나 보다. 우리 나중에 또 와요.”

“그래.”


엄마의 말끝에서 약간의 씁쓸함이 묻어났지만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했다. LA로 돌아오는 길에 숙희 씨는 고속도로에서 운전도 했다. 자유로움을 넘어 해방감마저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우리에게 세 번째 라스베이거스 여행이 허락된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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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에는 LA에 살고 있는 엄마의 조카이자 나의 사촌을 만났다. 외삼촌도 함께 했으면 좋았겠지만 그 당시 캘리포니아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주에 거주하며 손주 육아 중이었기에 만나지 못했다. 사촌은 나와 동갑이라 엄마에겐 또 다른 딸 같은 존재였다. 30여 년 전 같이 인형놀이를 하던 아기들이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자라 한국과 미국에서 각자 터전을 잡고 살아가고 있으니 보는 엄마는 어떤 감정이 들었을까. 라이딩 해준 사촌 덕분에 게티 센터에서 작품 감상을 하고 파머스 마켓에 가 늦은 점심으로 타코를 먹었다. 국민학교 1학년 때 이민을 가서 한국말이 익숙하지 않은 사촌이었지만 부모님 덕에 리스닝은 어느 정도 가능했는지 엄마의 말을 열심히 경청해 주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도 한인타운에서 만나 점심을 함께 하고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모처럼의 고모와 조카의 오붓했던 시간으로 숙희 씨 마음에 오래오래 남을 시간이었으리라.


행복이라는 감정이 너무 컸다 보니 잠시 우려를 잊고 있었다. 깊숙이 묻어 둔 불길한 낌새는 게티 센터에 갔던 날 고개를 들었다. 미술관에서 내려오는 길, 트램을 타려던 찰나 엄마가 기침을 시작했다. 사레가 들린 줄 알고 물도 건네고 등도 두드려봤지만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조용한 트램 안에서 기침 소리만이 매섭게 정적을 갈랐다. 사촌도 나도 아이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요란하고도 수상했던 기침은 주차장에 다다를 즈음에야 겨우 진정되었다. 그때만 해도 그 몹쓸 것이 엄마를 그토록 끔찍하게 괴롭힐 줄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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