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나라로

by 해니

“해니야, 엄마아빠 미국 여행가려고 하는데 같이 갈래?”


2019년의 봄이 채 오기도 전, 아빠의 갑작스런 제안에 눈앞이 뱅글뱅글 돌았다. 미국에 있는 지인들과 국립공원 트래킹을 갈 계획인데 겸사해서 조금 길게 체류하며 같이 다니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엄마, 나, 손녀까지 해서 넷이서 말이다.


미국은 우리 가족과 인연이 깊은 나라다. 우리나라가 8-90년대 세계화의 물살을 타던 당시 공직에 있던 아빠는 해외출장을 많이 다녔다. 아빠가 가져온 기념품들 중에는 디즈니 비디오테이프 세트가 있었다. 이걸 꽤나 좋아해서 무자막임에도 무진장 돌려보곤 했다. 그렇게 자연스레 영어를 접하게 됐다. 그러던 중 1991년도에 큰외삼촌 가족이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이민을 갔다. 어느 정도 정착을 한 뒤 외삼촌은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미제 물건을 한아름 싣고 왔다. 초콜릿, 견과류, 가방, 지갑, 화장품 등등...... 이세계에서 온 듯한 화려한 패키지와 격하게 꼬부라진 영어들이 빼곡히 들어찬 물건들을 볼 때마다 입이 떡 벌어졌더랬다. 성인이 되고서는 외삼촌 댁으로 어학연수도 다녀올 수 있었다. 그곳에서 접하는 모든게 별천지였고 그저 다 좋아보였다. 물론 세상에 완벽한 국가는 없지만, 적어도 그 시점의 미국은 문자 그대로 ‘아름다운 국가’로 내 마음속에 자리했다.


엄마와 같이 미국에 간 건 고등학교 때 한번 뿐이었다. 그 뒤로는 다시 갈 기회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투병 중에도 틈틈히 비행기를 탔던 엄마는 동생과 사촌동생을 데리고 서부 여행을 다녀왔다. 그때는 내가 육아 중이라 함께 하지 못해 많이 아쉬웠더랬다. 그런데 웬걸, 이번엔 엄마빠가 같이 가자고 한다. 아이가 7살이라 제

법 데리고 다닐만 한 나이라 안 갈 이유가 없었다. 코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고 올 절호의 찬스였다.


“네! 갈게요!”


6월에서 7월에 걸쳐 약 3주간의 일정이었다. 로스앤젤레스의 한인타운 에어비앤비를 거점으로 두고 지내며 중간에 라스베가스에 다녀오고 아빠는 친구들과 요세미티 국립공원으로 트래킹을 다녀오기로 했다. 차를 렌트해서 다닌다 하더라도 다소 긴 여행 일수였기에 엄마의 체력이 괜찮을까 싶었지만 언제나처럼 강한 척하는 숙희 씨였다.


“약 때문에 설사 부작용이 좀 있긴 한데 괜찮아.”

“힘들면 어디 안 가고 숙소에만 있으면 돼.”


우리 집의 가풍 중 하나는 ‘쓸데없이 과하게 걱정하지 말기’였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걱정된다고 자꾸 관심을 가지고 뭐라도 해보려고 하면 묘한 단호함과 함께 거절 당한다. 병원에서 처방해준 스멕타를 보여주며 괜찮다고 하는 엄마 앞에서 뭐라 더 할 이야기가 없었다.


비행기 좌석은 이코노미였다. 원래 엄마 아빠 두 분만 가는 일정이었으면 비즈니스를 끊으려고 했는데 우리가 끼는 바람에 좋은 자리에 앉아 가지 못했다. 편치 않은 몸에 에너지를 최대한 아껴가며 다녀야하는 숙희 씨의 몸을 몹쓸 자리에 앉혀 가는 듯 해 속상했다. 더 좋은 좌석 끊어드릴 걸 하는 마음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그렇게 차마 표현치 못한 우려와 후회들을 짐에 욱여넣고 우리는 LA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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