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수 있는 기간 동안, 아등바등 돌아다니지 않고 쉴 때는 숙소에서 푹 쉬고 가까운 곳 위주로 여유롭게 다녔다. 날이 좋을 때면 숙희 씨는 쾌적한 자리를 귀신같이 찾아 고로롱거리는 고양이처럼 볕이 잘 들면서도 눈이 부시지 않은 곳에 앉아 뜨개질을 했다. 숙소 근처 가주마켓에 가 장도 보고 반찬도 만들었다. 마치 우리가 여기 사는 사람들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반 현지인, 반 여행자로서의 정체성을 내려놓고 이제 한국으로 떠나기 전날, 와인을 마시며 우리는 동영상을 남겼다. 미국에서 살고 싶다고 칭얼대는 아이의 귀여운 모습과 이를 바라보며 흐뭇해하는 엄마 아빠의 미소가 담겼다. 여행의 마무리로 내년을 기약하는 바람을 함께 이야기하기도 했다.
“내년에 또 올까? 그때는 마이애미로?”
“오, 좋지~”
“좋아요, 좋아요! 저희 또 껴주시는 거죠?”
“하하 그래 그래! 자, 우리의 성공적이었던 여행을 위하여! 짠~”
그렇게 마지막 밤을 도란도란 보냈다.
여독을 풀고, 현실로 돌아왔다는 감각을 되찾은 뒤 다시 만난 엄마는 컨디션이 부쩍 안 좋아져 있었다. 사위의 생일을 맞아 엄마 아빠가 지내고 있던 양양으로 갔는데 미국에서 봤던 체력의 절반도 내지를 못하는 숙희 씨를 보며 많이 당황했다. 낙산 해수욕장의 모래사장에서는 내내 파라솔 밑에만 앉아 있었고, 밤 해변을 걸을 때도 부축이 필요한 지경이었다. 미국에 다녀온 후로 엄마의 기침이 부쩍 늘었다는 아빠의 이야기를 들었다. 안 그래도 끙끙 앓는 듯 자느라 수면의 질이 안 좋은데 설상가상으로 기침까지 더해져 잠도 못 자고 식사도 잘 못하는 것 같았다. 왜일까? 무엇이 원인이지? 아주 오래전 했던 기관지 내시경을 엄마는 끔찍하게 괴로운 기억으로 갖고 있는데 혹시 기관지가 더 약해지거나 문제가 생긴 걸까? 별의별 근심과 걱정이 먹구름처럼 몰려왔다.
숙희 씨의 기침의 빈도와 강도는 점점 세졌다. 그만큼 엄마는 쇠약해져만 갔다. 그러다 엄마가 올 초부터 몇 년간 복용하던 임상 약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암이 번지는 걸 틀어막고 있던 약이 사라지자 봇물 터지듯 엄마 몸을 집어삼키고 있는 것이었다. 약을 왜 그만둔 거냐고 아빠에게 물어보니 약 부작용으로 엄마가 너무 힘들어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고맙고도 망할 임상 약은 잦은 설사로 엄마를 괴롭혀 온 것이다. 숙희 씨의 마음을 헤집어 놓고 싶지 않아 단약을 결심한 그 계기에 대해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엄마는 그저 지쳤던 것이다. 몸과 마음이 모두.
게티 센터에서 시작된 그 기침은 신호탄 같은 것이었다. 콜록대던 엄마의 몸에 새로운 덩어리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정수리에 하나, 다리에 또 하나. 종아리에 새로 난 암세포를 제거하기 위해 감마나이프 치료를 받으러 갔던 엄마는 힘들었을까 봐 걱정하는 딸에게 되려 센 척했다.
“이까짓 것, 여러 번 했더니 이젠 별 거 아니야.”
몸에 가해지는 고통은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했지만 사실 몸보다 마음이 더 아팠던 모양이다. 아빠와 동행해 방사선실에 간 상황에서 있었던 일화를 슬픈 눈빛으로 들려줬다.
“치료받으러 들어갔더니 방사선사가 뭐랬는 줄 아니? 나보고 어머님이라고 하더라. 네 아빠를 내 아들이라고 본 거지. 내가 아무리 아프고 나이가 들었어도 그건 좀 아니지 않냐.”
“와, 그 사람 눈썰미 진짜 꽝이다! 뭐라고 하지 그랬어요. 속상하게시리.”
스러져가는 본인의 모습을 남의 눈으로 확인받는 건 얼마나 잔인한가. 그토록 씁쓸하고 서글픈 엄마의 미소는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갔고 그 사이 딱히 더는 쓸 수 있는 약이 없음을 판정받은 엄마의 몸은 곧 촛농에 먹힐 듯 사그라드는 촛불처럼 위태로워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