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니를 제대로 못 먹는 나날들 뒤에는 힘이 없어 혼자 서있지도 못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몰라보게 수척해진 엄마를 휠체어에 태우고 호스피스로 갔다. 의사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권유였다. 당장 들어갈 곳을 수소문하다가 잠시 자리가 빈 곳을 찾았고, 며칠만이라도 간호를 받게 하기 위해 입소를 서둘렀다. 그 와중에도 엄마는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챙겼다.
“수건도 가져와, 종이컵 같은 것도. 엄마 샌들은 장 안에 넣어 놔.”
미국에서 사서 신고 온 빨간빛이 쨍한 샌들을 나는 한참을 바라봤다. 엄마가 이걸 신고 다니는 모습을 다시 볼 수 없을까 봐 괜스레 울컥했다. 착잡한 마음이 한가득이었지만 그래도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기분이 들었다. 몇 년 전에도 엄마는 위태로운 지경까지 갔지만 기적적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의 조각을 속에 품고 있었다.
병동에서 놓아주는 진통제와 안정제들이 잘 들어서였을까, 숙희 씨는 혼자 화장실도 가보려 하고(부축은 필수였지만) 걱정을 안고 한달음에 온 지인들에게 웃으며 농담도 던지곤 했다. 기침의 원인은 ‘폐수종’이었다. 폐에 물이 자꾸만 차올랐던 것이다. 이뇨제가 도움이 되었는지 기침도 많이 줄었다. 그냥 조금 식사를 못 해 체력이 많이 떨어졌을 뿐, 엄마는 곧 회생할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건 내 생각일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여 털고 다시 일어나야지.”
라는 지인의 말에 엄마는 말없이 웃음기 흐르다 만 표정으로 앙상한 다리를 덮은 모포 한구석을 바라볼 뿐이었다.
약 2주 정도 지났을까, 병동 측의 사정으로 우리는 엄마를 친정집으로 다시 모셔야 했다. 집에 가고 싶다는 숙희 씨의 의사도 한몫을 했다. 돌아온 엄마는 최소 중의 최소한의 활동을 하며 며칠을 보냈다. 음식도 조금 해보려 하고 볕이 들면 뜨개질도 하다가 노곤하면 졸기도 했다. 씻는 것도 꾸역꾸역 본인이 해결하려고 했다. 머리 감는 거 정도는 딸한테 맡겨도 될 것을, 무슨 자존심인지 절대 혼자 하려고 했다. 저러다 쓰러질까 봐 조마조마한 딸내미 마음은 하나도 몰라주는 까칠한 숙희 씨였다.
“아, 내가 해드린다니까요 쫌.”
“됐어. 내가 해. 절로 나가 있어.”
부쩍 기운이 달려 보였지만, 그래도 늘 그 자리에 있던 엄마 모습 그대로였다.
식사를 너무 못하는 듯해 목 넘김이 쉬울 음식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라스베이거스의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미네스트로네 수프’를 만들기도 했다. 엄마가 ‘이런 맛은 처음 먹어 본다.’며 숟가락 바쁘게 먹었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내 나름 기억을 되짚어 재현해 봤는데 아쉽게도 완벽히 똑같지 않았기 때문인지 숙희 씨는 몇 숟가락 뜨지 못했다. 집에 돌아온 초반 며칠만 잠깐 괜찮았던 엄마는 다시 식사를 못 하고 더 기운이 빠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결국 다시 호스피스에 들어가기로 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한 계단, 두 계단 내려가던 컨디션은 첫 번째 호스피스 들어오기 전에 크게 한번, 그리고 두 번째 호스피스에서 더 크게 한번 떨어졌다. 마치 대여섯 계단을 한 번에 내려가기라도 한 듯한 차이였다. 앙상해진 엄마 곁에는 아빠가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매일 아이를 유치원에 보낸 뒤 병동으로 와 잠시라도 아빠를 쉬게 해 드리는 것이었다. 우리가 부산하게 왔다 갔다 하는 걸 보며 불현듯 옛날 생각이 난 숙희 씨가 말했다.
“전에 네 외할아버지 아프실 때...... 할머니가 할아버지 모시고 병원 다니고 그럴 때 나는 딸인데도 잘 못 도와드렸었는데 너랑 아빠가 이렇게 하는 거 보니까 (할머니한테) 좀 미안하네.”
“그걸 엄마가 왜 미안해해요...... 엄마도 엄마 사정이 있었는 걸. 너무 멀리 살기도 했고.”
내 말에 숙희 씨는 씁쓸하게 웃었다.
병동에 있는 동안 우리는 긴 대화를 하지는 못했다. 힘겹게 안정제를 맞고 잠에 든 시간을 뺀 약간의 시간에 우리는 손님맞이를 하고 약간의 담소를 나누었다. 하루는 엄마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 궁리를 하다 내 인스타그램 계정을 켰다. SNS 자체를 안 하는 엄마에게 딸내미의 온라인 일기를 펼쳤다. 평소 이런저런 일상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나누는 모녀지간이었지만 왜인지 인스타 계정은 오픈하지 않았다. 애초에 엄마가 앱을 안 깔아 둔 것도 한 이유였다. 시큰둥할 줄 알았던 엄마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눈을 반짝이며 나와 손녀의 일상을 들여다봤다. 동네 아이들과 놀며 찍은 사진, 앞니가 다 빠져 씩 웃고 있는 모습, 미국에서 함께 한 순간들을 보면서 숙희 씨는 꽤 크게 미소 지었다. 진즉에 보여드릴 걸 그랬나 보다.
가족들과 지인들의 방문에 이어 수녀님도 오셔서 기도를 해주셨다. 병동이 카톨릭계 병원 호스피스였기에 같은 층의 너른 공간에서 아픈 신자들을 위해 신부님이 기도를 해주시기도 했다. 일어날 수 없어 침대 채로 이동해 경건한 기도를 듣던 엄마의 표정을 기억한다. ‘이게 다 뭔가.’싶은 듯한 텅 빈 표정이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숙희가 종부성사를 봤다고?!”
이날의 기도는 이야기가 잘못 돌아 환자가 죽기 전 보는 종부성사로 와전되어 가족들을 크게 놀라게 했다. 엄마는 하루하루 쇠약해져 갔지만 모두의 마음은 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엄마는 그런 존재였다. 작지만 단단하고 정신력이 강한 사람. 그래서일까, 이제는 정말 더 버티기 힘든 걸까 싶으면서도 분명 괜찮아질 거라고, 다시 집으로 돌아올 거라고 어렴풋이 믿고 있었다. 내 마음은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