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그즈음의 나는 하늘을 쏘아보며 다녔다. 엄마가 저렇게 누워있는 와중에 이토록 높고 푸르다니, 괘씸하고 야속했다. 세상은 놀라우리만치 그대로인데 우리 주변에만 폭풍우가 치는 그런 감각이었다.
2주 간 머물렀던 두 번째 호스피스에서 다시 나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별 수 없이 속상한 마음을 부여잡고 이곳저곳 적합한 곳을 찾아다녔다. 서울권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어 경기권역 내에 가격이 좀 비쌌지만 우리 집과 가까운 모 호스피스로 옮기기로 했다. 덕분에 매일 엄마에게 가볼 수 있었다. 폐에 자꾸 차오르는 물 때문에 고생 고생하며 이동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숙희 씨는 새 호스피스 공간이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나마 너한테 가까워서 다행이네.”
자신이 힘든 것보다 딸이 고생하는 게 안쓰러웠나 보다. 정작 걱정받을 사람은 숙희 씨인데도.
이곳에서도 숙희 씨는 참 숙희 씨 다웠다. 필요한 걸 딱딱 표현하고 지시했다. 우리는 그저 잘 듣고 엄마가 불편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특유의 유쾌함도 잃지 않았다. 작은 외삼촌이 와서 엄마가 한 투자와 관련해서 좋은 소식을 전했는데, 앉아서 핸드폰을 보며 오른 주먹을 불끈 쥐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예쓰!’를 외치기도 했다. 외할머니와 인사할 수 있도록 손녀를 데리고 갔을 때도 엄마는 그저 엄마답게 손녀 걱정뿐이었다.
‘쟤가 지금 내가 무서워. 이 몰골이 무섭지. ○○이 감기 빨리 나아라.’
엄마는 오래전,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의 모습이 너무 참담해서 아직 중학생, 초등학생이었던 우리가 보고 놀랠까 봐 걱정했다는 이야기를 몇 번 했었다. 그 때문인지 엄마는 손녀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을까 봐 우려하고 있었다. 말하는 게 힘겨워진 와중에도 필담을 통해 걱정을 전하는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식사라고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하지 못한 지 몇 주 째, 몸에 들어오는 건 영양제와 진통제, 안정제뿐이던 엄마는 그 어느 때보다도 목말라했다. 그렇다고 물이나 음료를 구강 주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머리를 굴린 숙희 씨는 묘안을 냈다. 아이스 바에 꽂혀있는 나무 막대 같은 걸 구해다가 끝 부분을 거즈로 두른 뒤, 그 부분을 물이나 오렌지 주스로 살짝 적셔서 냉동실에 넣어두어 필요할 때 꺼내 쓰는 것이었다. 얼린 물과 주스는 엄마의 갈증을 미약하게나마 해소해 주었다. 시원한 물 한 잔 벌컥벌컥 드실 수 있게 해드림 좋았겠지만 당시로선 그게 최선이었다. 숙희 씨는 그것도 어디냐는 표정으로 곧잘 아이스 거즈를 입에 물고 있었다. 우리는 ‘역시 김숙희 씨!’라며 그 해결사다운 면모를 치켜세웠다.
호스피스 주치의로부터 짧으면 3주, 길면 2개월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즈음, 숙희 씨는 카톡으로 나눈 대화를 끝으로 더는 아무 표현도 하지 못했다. 폐에 찬 물은 침상에 누워있는 엄마를 마치 물에 빠진 사람처럼 만들곤 했다. 갑자기 숨이 가빠오고 호흡이 힘든 증상이 나타나면 덱타손과 옥시넘, 이뇨제, 아티반 같은 약제로 진정시키곤 했는데 모두가 잠든 새벽, 별안간 닥친 호흡곤란 이후 엄마는 그대로 긴 잠에 빠진 듯 아무 활동도 하지 못하게 됐다. 숙희 씨는 저 깊은 강물의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고 있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