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책 기획이 하나 있다. 바로 엄마에 관한 책이다. 5년 전 멀리 소풍을 떠나버린 우리 엄마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엄마는 아주 오래전부터 가계부 겸 짧은 일지를 썼다. 검은색 인조가죽 커버에 금색이나 은색으로 그 해의 연도가 형압 처리된 옛날식 노트에 기록을 했다. 엄마가 기록을 꾸준히 해온 걸 안 것은 고등학생 때쯤이었던 것 같다. 안방 화장대에는 노트가 항상 펼쳐져 있는 고정석이 있었는데 이따금 오며 가며 훔쳐보곤 했다.
그 안에는 그날그날 무엇에 지출을 했는지, 어떤 이벤트가 있었는지, 엄마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가 짧게는 한두 줄, 길게는 서너 줄 정도로 적혀 있었다. 일기라고 하기엔 너무나 짧았지만 이 정도 분량이기에 그 긴 세월을 꾸준히 기록할 수 있었겠지 싶다. 놀랍게도 엄마의 기록 노트는 1983년도부터 돌아가시기 몇 달 전인 2019년도까지가 상자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엄마의 36년 역사가 담긴 이 노트 전부를 유품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 기록들은 우리 집안의 산 역사 그 자체이다. 엄마가 20대 중반에 결혼해 시집으로 들어와 시어머니와 남편 외에 결혼 안 한 시누이와 시동생까지 건사하며 꾸려 낸 가계부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소득이 적은데 식구는 많은 상황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엄마의 씀씀이를 보면 경외감과 안쓰러움이 물밀듯 밀려온다. 몇 십 원짜리 아이스크림, 고등어 한 손 가격뿐 아니라 그 와중에 부지런히 한 투자 내역까지...... 엄마의 절약과 투자 정신이 노트 안에 찬란히 빛나고 있다.
엄마는 시니컬하면서도 위트 있는 사람이었다. 노트에 가계부 외에 누구를 만나고 무슨 경조사를 다녀왔고 나와 동생에게 있던 이벤트 등등을 써 놓았는데 그 표현이 재밌어서 읽다 보면 입꼬리를 씰룩하게 된다. 엄마의 단상이 담긴 6년 전 어느 날의 메모를 발췌해봤다.
‘미국 올케언니 보약 먹으라고 엄마가 백만 원 보내주라 하셔서 송금. 백만 원 송금에 수수료를 35불이나 받는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보낼 때는 15불이라는데. 우리나라 은행은 도둑놈이다.’
비싼 수수료에 야속해하는 엄마 마음이 전해져서 피식 웃음 짓게 된다. 목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함께 우스갯소리를 나누며 낄낄대던 그 시절이 참 그립다.
숙희 씨는 갑상선암에서 벗어나 저 하늘에서 자유롭게 잘 지내고 계시리라 믿는다. 그렇지만 고작 36년밖에 같이 보내지 못한 딸의 입장에서 엄마의 삶이 너무 안타깝게 느껴진다. 너무 착하고 성실하셨어서, 애초에 약하게 태어난 데다 일찍 아픈 바람에 이 세상에 좀 더 자취를 남기지 못한 아쉬움을 그림 에세이라는 형태로 풀어보려 한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엄마의 삶을 재조명해 드릴 수 있는 책을 꼭 세상에 선보이고 싶다.
2024년 볕이 아름다운 어느 날, 유난히 엄마가 많이 그리운 딸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