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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rayura Jul 19. 2018

어설프게 만화가를 꿈꾸는 직장인 3

음지에서 양지, 다시 음지로 (feat. 후르바, 최유기, 얼음요괴...

언제든 신속하게 문제집으로 덮어버릴 수 있게 대기시켜두고, 방으로 들어오려는 발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음악 볼륨은 나지막이. 누군가가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어느 정도 시간이 되면 한 번씩은 거실로 나와 몸을 풀어주는 척하며 가족들의 동향을 살피기. 뜻하지 않은 방문객이 있어도 어색하지 않게 문제집을 끌어와 덮으며 당황한 기색 숨기기. 착한 딸이자 (나름) 모범생이었던 나는 이렇게 '몰래한 사랑'을 키워나갔다. 


고3이 지나면 봄이 찾아오리라 기대했던 나에게, 난이도가 낮아져 변별력이 떨어져 버린 00학년도 수능과 대학 원서 작성할 때에도 꺾이지 않은 나의 자존심 덕분에 1년의 겨울이 추가되었다. 노량진의 재수학원을 학교마냥 다니면서, 일상을 함께 했던 친구들과 분리되어 아무런 소속이 없이 (고등학생도 대학생도 아닌) 재수생으로 지낸다는 자괴감의 기간이 잠시. 시간이 좀 흐르자 나는 집-학원-집-학원의 일정에 익숙해져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고, 집에 돌아와서는 늦은 시간이라도 나의 굴에 틀어박혀 나의 아이들을 키우는 것에 몰두하였다. 만화에 대한 애정을 분출시킬만한 서클 활동도 없고, 생색내며 그림을 그려줄 학우도 없으며, 새내기 생활에 심취한 친구들의 술자리 자랑-당시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이 내가 현실세계와 더 동떨어져 있음을 실감하게 만들어주는 나날 동안 나는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만화를 그리며 마치 '디아더스'의 니콜 키드먼처럼 햇볕 알레르기라도 가지고 있는 것 마냥 나의 아이들을 숨기고 음지로 몰아넣었다.

'2000년 1월 15일' 이라고 날짜가 적힌 그림. 고로, 고3 수능이 끝나고 자괴감에 빠져있을 무렵.


대학생이 됨과 동시에 나는 나의 모든 내적, 외적 활동이 활짝 꽃 피워지리라 기대했지만 실상은 그러하지 못했다. 가장 큰 원인은, '하지 말라 하는 것을 몰래 하는 것에 대한 쾌감'이 부족함에서였으리라. 새내기 생활에 휩쓸려 다니고, (안타깝게도 단과대학 내에 만화 동아리가 없어 밴드 동아리에 가입했다.) 낯선 것들에 주눅 들며 무기력을 배워나갔다. 첨예하게 몰아붙이며 수능이라는 마감을 준비하던 두뇌는, 낯설고도 방만한 대학 생활에 화장실 휴지가 물에 풀어지듯 흐드러져 목적도 방향도 없이 시간 속을 부유했다. 

단과대학 동아리 공연 포스터 (시안). 아이러닉하게도 이것이 스크린톤을 사용하여 그린 나의 마지막 그림이 되었다.

그러던 중 다시 활기를 얻은 계기는, 당시 활성화되어있던 코믹 페스티벌에 참가를 마음먹은 것부터였다. 고등학생 때에도, 아카로 대표되는 코믹 페스티벌에서부터 게토니 블랙체리니 하는 마이너 한 페스티벌까지 기웃거리며 일러스트 사진이나 회지, 캐릭터 상품 (대부분은 손수 그린 그림을 칼라 복사하거나 출력해서 모양대로 오리고, 코팅 후에 구멍을 뚫어 고리를 다는 것) 등을 사서 저희끼리 자랑하곤 했다. 첫 참가에는 당시에 인기 있었던 만화-최유기-의 캐릭터를 내 스타일대로 그려서 코팅한 것을 판매했는데, (여러 차례) 그림을 그리고 친구 집에서 스캔하고 칼라 출력하고 모양대로 오리고 문구점 가서 코팅하고 코팅한 것을 또 모양대로 오리고 구멍 뚫고 고리를 끼우는 초 노동 집약적인 과정에도 불구하고 참가비 본전도 건지지 못했다. 

2001년 코믹월드 페스티벌에 데뷔한 나의 현장 삼장 (최유기). 여러 가지의 캐릭터 일러스트 중에 그나마 판매 수를 올려준 주인공이다.


이에 굴하지 않고 다음 코믹 페스티벌에는 좀 더 발전된 모습을 보이리라 마음먹었다. 만화를 좋아하고 마음이 맞는 친구와 함께하게 된 덕분이 컸는데, 당시 인기 있었던 최유기와 후르츠바스켓, 인기를 막 끌고 있던 나루토,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친구와 내가 애정하였던 펫숍오브호러스, 얼음요괴이야기 등을 타깃으로 선정하고 작업에 들어갔다. 좀 더 귀엽게, 좀 더 다양하게 그림을 그려 판매대에 올렸고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에서) 기대 이상의 성황을 이루었다. 하지만 앞서 얘기한 대로 초 노동 집약적인 작업인 데다, 이삼백 원짜리 제품(?)을 만들기 위해 딱딱하게 코팅된 코딱지만 한 일러스트를 하나하나 가위로 오려내야 했고, 그러한 것들을 수백여 개를 팔아 네댓 명의 친구들과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거하게 한 끼니 먹을 정도의 돈을 벌고는 탈탈 털어버렸으니, 성공이라 할 수 있을지 어떨지 애매했다. (결국 미처 다 판매하지 못한 캐릭터 제품 무더기와 욱신욱신한 손가락만이 남았다.) 무엇보다도, 쭉 노력하여 인지도를 얻고 결국 나만의 만화를 선보이려는 나의 최종 목표는 너무나 요원했다. 그리고 슬슬 다시 학업에 매진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나와 친구의 다분히 마이너한 취향이 반영된 '얼음요괴이야기'와 '펫숍 오브 호러스' 캐릭터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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